예수님이 믿어지지 않아요

예수님을 믿고 싶은데 믿어지지가 않아요

예수님을 믿고 싶지만 마음으로는 잘 믿어지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성경을 읽고 설교를 들어도 확신이 생기지 않고, 다른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고백하는 말을 나는 억지로 따라 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정말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실까요?”

“부활은 실제로 일어난 일일까요?”

“내가 믿는다고 말해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의심하고 있는 것 아닐까요?”

이런 질문이 있다고 해서 예수님에게서 멀리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진실하게 믿고 싶기 때문에 생기는 질문일 수 있습니다. 아무런 고민 없이 믿는 척하는 것보다, 자신의 의심을 인정하며 진리를 찾는 태도가 더 정직합니다.

믿음은 억지로 확신을 만들어 내는 일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은 믿음을 강한 확신이나 특별한 감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배 중에 마음이 뜨거워지고, 눈물이 나며, 하나님이 분명히 느껴져야 믿음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감정은 믿음의 전부가 아닙니다. 감정은 환경과 몸의 상태에 따라 변합니다. 어떤 날에는 하나님이 가까이 느껴지고, 어떤 날에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믿음은 자신에게 계속 “믿어야 한다”고 명령하여 확신을 만들어 내는 자기암시가 아닙니다. 믿음은 자신이 모든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아보기 위해 그분께 마음을 여는 것입니다.

“나는 아직 확신하지 못하지만, 예수님을 더 알고 싶습니다”라고 말하는 것도 믿음을 향한 움직임입니다.

성경에도 믿고 싶지만 믿기 어려웠던 사람이 있습니다

한 아버지가 귀신 들린 아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왔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이 말은 논리적으로 모순처럼 들립니다. 믿는다고 하면서 동시에 믿음이 없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인간의 실제 마음입니다. 믿고 싶은 마음과 의심하는 마음이 한 사람 안에 함께 있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에게 완벽한 믿음을 먼저 준비해 오라고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흔들리는 믿음으로 자신에게 나온 그를 받아 주셨습니다.

도마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보기 전에는 믿지 못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의심을 칭찬하지는 않으셨지만, 의심하는 도마를 버리지도 않으셨습니다. 다시 찾아오셔서 상처를 보여 주시고 믿음으로 초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질문이 없는 사람만 받아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의심을 품고도 찾아오는 사람을 만나 주시는 분입니다.

믿음은 예수님에 관한 내용을 인정하는 것보다 깊습니다

예수님이 역사적으로 존재하셨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과 예수님을 믿는 것은 다릅니다. 믿음은 예수님에 관한 몇 가지 교리를 머리로 동의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내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나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께 자신을 맡기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을 신뢰하려면 먼저 그 사람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잘 믿어지지 않는다면 억지로 믿음을 만들어 내기보다, 복음서를 읽으며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살펴보는 것이 좋습니다.

예수님이 누구를 만나셨는지, 죄인과 약한 사람을 어떻게 대하셨는지, 무엇을 가르치셨으며 왜 십자가를 지셨는지를 천천히 읽어 보십시오. 믿음은 막연한 존재를 상상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증언하는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을 알아 가면서 자랍니다.

의심에는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믿어지지 않는 이유가 지적인 질문 때문일 수 있습니다. 기적과 부활이 가능한지, 성경을 신뢰할 수 있는지, 하나님이 계시다면 왜 악과 고통이 존재하는지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이런 질문은 공부하고 대화하며 차근차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질문을 죄책감으로 덮으면 의심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 깊은 곳에 숨어 버립니다.

그러나 때로는 지식보다 상처가 믿음을 막기도 합니다. 아버지에게 상처받은 사람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기 어려울 수 있고, 교회에서 상처받은 사람이 예수님까지 신뢰하지 못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오래 기도했지만 응답받지 못한 사람은 다시 하나님을 기대하는 것이 두려울 수 있습니다.

이 경우에는 논리적 설명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실망과 분노를 하나님 앞에 솔직하게 드러내고, 신뢰할 수 있는 사람과 상처를 함께 다루어야 합니다.

믿음을 얻으려면 먼저 믿어야 하나요?

믿음은 인간의 결심만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믿음도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합니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믿음이 생기기를 기다리기만 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믿음이 약한 상태에서도 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복음서를 읽을 수 있습니다. 예배의 자리에 머물 수 있습니다. 신뢰할 만한 목회자나 성도에게 질문할 수 있습니다. 짧게라도 기도할 수 있습니다.

기도가 잘 나오지 않는다면 이렇게 말해도 됩니다.

“예수님, 저는 주님을 믿고 싶지만 아직 믿어지지 않습니다. 제가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지 보여 주시고, 주님이 참으로 누구신지 알게 해 주십시오. 제 마음을 억지로 속이지 않게 하시고, 진리를 만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십시오.”

이 기도는 믿음이 완성된 사람이 드리는 기도가 아닙니다. 믿음을 구하는 사람이 드리는 정직한 기도입니다.

모든 의심이 사라져야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모든 질문에 완벽한 답을 얻은 뒤에 믿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어떤 관계에서도 모든 것을 완전히 확인한 뒤 신뢰하지는 않습니다.

결혼하는 사람도 배우자의 미래 행동을 모두 알고 결혼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사람을 알아 온 증거와 관계의 신뢰를 바탕으로 자신을 맡깁니다.

기독교 신앙도 맹목적인 도약은 아니지만, 수학 공식처럼 모든 불확실성이 제거된 뒤 시작되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삶과 말씀,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증언을 살펴보고, 그분이 신뢰할 만한 분인지 판단한 뒤 자신을 맡기는 것입니다.

믿음 안에도 아직 풀리지 않은 질문이 남을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질문이 하나도 없는가가 아니라, 그 질문을 가지고 누구에게 가는가입니다.

믿음의 크기보다 믿음의 대상이 중요합니다

작은 믿음이라도 참된 예수님을 붙든다면 의미가 있습니다. 구원은 우리의 믿음이 강하기 때문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이신 그리스도께서 충분한 구주이시기 때문에 이루어집니다.

떨리는 손으로도 튼튼한 밧줄을 붙들 수 있습니다. 사람을 안전하게 하는 것은 손의 떨림이 아니라 밧줄의 견고함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믿음만 계속 검사하지 마십시오.

“나는 충분히 믿고 있는가?”

“내 믿음은 진짜인가?”

이 질문만 반복하면 마음은 더 불안해질 수 있습니다. 자신의 믿음의 강도보다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오는 사람을 결코 내쫓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믿고 싶다는 마음을 가볍게 여기지 마십시오

예수님을 믿고 싶지만 믿어지지 않는다는 말 속에는 이미 그분을 향한 갈망이 있습니다. 완전한 믿음은 아니더라도 문 앞에 서서 두드리는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완성된 믿음을 가진 사람만 부르지 않으십니다. 의심하는 사람, 실패한 사람, 두려워하는 사람에게도 “내게로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지금 당장 강한 확신을 만들어 내려고 애쓰지 않아도 됩니다. 예수님께 정직하게 가까이 가십시오. 질문을 숨기지 말고, 복음서를 읽고, 기도하며,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그분을 알아가십시오.

믿음은 어느 날 갑자기 모든 의심이 사라지는 사건으로 올 수도 있지만, 오랜 시간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성품을 알아가면서 조용히 자랄 수도 있습니다.

믿음의 시작은 “나는 모든 것을 확신합니다”라는 선언이 아닐 수 있습니다. 오히려 다음과 같은 기도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 제가 믿고 싶습니다. 믿을 수 있도록 저를 도와주십시오.”

그 기도를 드릴 수 있다면, 이미 예수님을 향해 한 걸음을 내딛고 있는 것입니다.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주일 대표기도문 2025년 11월 23일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

2026년 8월 주일 낮 예배 대표기도문 모음, 첫째주, 둘째주, 셋째주, 넷째주, 다섯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