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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믿는데 왜 낙심할까요?

하나님을 믿는데 왜 낙심할까요? 하나님을 믿는데도 마음이 무너질 때가 있습니다. 기도했지만 현실은 달라지지 않고, 최선을 다했지만 열매는 보이지 않으며, 믿었던 사람에게 상처받기도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자신의 믿음을 의심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낙심하지 않아야 하는 것 아닐까요?” 그러나 낙심한다고 해서 믿음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의 믿음의 사람들도 깊이 낙심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영혼을 향해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라고 물었습니다.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놀라운 승리를 경험한 직후 광야로 도망하여 죽기를 구했습니다. 예레미야는 백성의 완고함과 시대의 비극 앞에서 눈물의 선지자가 되었습니다. 성경은 믿음의 사람을 언제나 강하고 밝은 사람으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무너진 자리에서도 하나님을 다시 부르는 사람으로 보여 줍니다. 낙심은 기대와 현실 사이에서 생깁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으면 일이 조금은 잘 풀릴 것이라 기대합니다. 기도하면 길이 열리고, 선하게 살면 좋은 결과가 돌아오며, 충성하면 열매가 맺힐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기대대로 움직이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정직한 사람이 손해를 보고, 사랑을 베푼 사람이 배신당하며, 오래 기도한 문제가 그대로 남아 있기도 합니다. 낙심은 단순히 일이 어려워서만 생기는 것이 아니라, 믿었던 기대가 무너질 때 찾아옵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도 그랬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것이라 기대했지만,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들의 문제는 예수님을 전혀 믿지 않았다는 데 있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이 생각한 방식으로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데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실패라고 생각했던 십자가가 실제로는 구원의 길이었습니다. 우리의 낙심도 때로 하나님의 부재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하심을 아직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깁니다. 낙심은 오래된 피로에서 오기도 합니다 영혼이 낙심하는 이유를 언제나 죄나 믿음 부족에서만 찾을 필요는 없...

신앙 난제·성경 난제·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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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난제·성경 난제·기독교 질문 칼럼 주제 100가지 하나님과 하나님의 존재에 관한 질문 하나님은 누가 만드셨나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나요? 하나님은 왜 자신의 존재를 더 분명하게 보여 주지 않으시나요?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는데 왜 인간을 시험하시나요? 하나님은 미래를 아시면서 왜 인간을 창조하셨나요? 하나님은 사랑이신데 왜 진노하시나요?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시는데 왜 뜻을 돌이키셨다고 기록되어 있나요?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시는데 지옥에도 계시나요? 하나님은 전능하시다면 스스로 들 수 없는 돌을 만드실 수 있나요? 하나님은 인간의 기도가 없어도 일하실 수 있는데 왜 기도하라고 하시나요? 창조와 인간의 기원에 관한 질문 하나님은 왜 세상을 창조하셨나요? 창조 이전에 하나님은 무엇을 하고 계셨나요? 하나님은 왜 인간을 흙으로 만드셨나요? 창세기의 하루는 오늘날의 24시간인가요? 창조론과 진화론은 함께 받아들일 수 있나요? 빛보다 태양이 나중에 창조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아담과 하와는 실제 인물인가요? 아담과 하와의 자녀들은 누구와 결혼했나요? 에덴동산의 선악과는 왜 필요했나요? 하나님은 인간이 타락할 것을 알면서 왜 선악과를 두셨나요? 죄와 타락에 관한 질문 죄란 단순히 나쁜 행동을 뜻하나요? 아담의 죄가 왜 모든 사람의 죄가 되나요? 인간은 본래 선한 존재인가요, 죄인인가요? 원죄가 있다면 인간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나요? 죄를 지을 자유가 없다면 참된 자유가 아닌가요? 하나님은 왜 사탄의 활동을 허락하시나요? 사탄은 왜 하나님께 반역했나요? 천사는 어떻게 죄를 지을 수 있었나요? 하나님은 왜 사탄을 즉시 멸하지 않으시나요? 죄를 반복해도 진실한 회개가 가능할까요? 고난과 악의 문제 선하신 하나님이 계시는데 왜 악이 존재하나요? 하나님은 왜 선한 사람에게 고난을 허락하시나요? 어린아이의 고통을 하나님은 왜 막지 않으시나요? 자연재해도 하나님의 심판인가요? 질병은 죄의 결과인가요? 하나님은 왜 전쟁과 학살을 허용하시나요? ...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요?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요? “믿음으로 산다”는 말은 교회에서 자주 듣지만, 실제로 무엇을 뜻하는지는 막연하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믿음으로 산다는 것을 모든 일이 잘될 것이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어려운 현실을 무시하고 무조건 기도만 하는 태도로 받아들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현실을 외면하는 낙관주의가 아닙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보이는 현실보다 하나님을 더 신뢰하고, 이해되지 않는 상황에서도 그분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것 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계신다는 사실만 인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사실을 머리로 인정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선하시고 신실하시며, 나의 삶을 아시고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믿는다는 것도 단지 그 사람이 존재한다고 인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의 성품을 신뢰하고, 약속을 의지하며, 자신의 일부를 맡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 역시 그분께 삶을 맡기는 관계적인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지식이면서 동시에 의탁입니다.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그 하나님께 실제로 자신을 내어 맡기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보이지 않아도 순종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은 아브라함이 갈 바를 알지 못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떠났다고 말합니다. 그는 목적지와 과정과 결과를 모두 알고 순종한 것이 아닙니다. 말씀하신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길을 나섰습니다. 믿음은 모든 것이 분명해진 뒤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아직 보이지 않고 이해되지 않는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한 걸음을 내딛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무모하게 행동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믿음은 생각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충분히 생각하고 기도한 뒤에도 알 수 없는 부분을 하나님께 맡기는 태도입니다. 우리는 미래 전체를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오늘 정직해야 한다는 것, 용서해야 한다는 것, 사랑해야 ...

천국에 대한 소망이 무엇인가요?

  천국에 대한 소망이 무엇인가요? 천국에 대한 소망은 단순히 “죽으면 좋은 곳에 간다”는 막연한 기대가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천국의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살며, 죄와 죽음으로 깨어진 모든 것이 새롭게 회복될 것을 기다리는 믿음 입니다. 많은 사람은 천국을 이 세상을 떠나 영혼이 구름 위에서 머무는 곳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소망은 현실을 버리고 다른 세계로 도피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과 창조 세계를 새롭게 하시고, 부활한 백성과 영원히 함께하시는 데 있습니다. 천국의 중심은 장소보다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천국을 생각할 때 먼저 아름다운 풍경과 황금길, 고통 없는 삶을 떠올립니다. 물론 성경은 천국에 눈물과 죽음과 아픔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천국의 가장 큰 복은 환경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하나님과 완전한 교제를 누리는 것 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며,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과 함께 계신다고 선언합니다. 천국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만 누리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영원히 기뻐하는 곳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경험하는 외로움과 불안의 가장 깊은 뿌리에는 하나님과의 단절이 있습니다. 죄는 인간을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하고, 자신과 타인과 자연으로부터도 소외되게 합니다. 천국은 이러한 모든 단절이 치유되는 자리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을 소망한다는 것은 단지 고통 없는 삶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보며 온전히 사랑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천국의 소망은 예수님의 부활에 근거합니다 기독교의 천국 소망은 인간의 상상이나 막연한 낙관주의에 근거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역사적 복음에 근거합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은 죽음이 인간의 마지막 운명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장차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부활할 것이라는 약속이자 첫 열매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인가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은 아름답지만 막연하게 들릴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사랑을 대개 감정으로 생각합니다. 마음이 뜨거워지고, 찬양할 때 눈물이 나며, 기도할 때 깊은 감동을 느끼는 것을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라고 여깁니다. 물론 이러한 감정도 소중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 사랑은 감정보다 더 깊고 넓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가장 귀하게 여기고, 그분을 신뢰하며, 그분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것 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먼저 사랑받았음을 아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일 4:19)고 말씀합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하나님 사랑은 인간의 결심에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찾으시고, 죄인을 용서하시며, 예수 그리스도를 내어 주신 사랑에서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려면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사랑받기 위해 애쓰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 사랑받은 사람으로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우리는 때때로 이렇게 생각합니다. “기도를 더 많이 해야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실 것입니다.” “죄를 덜 지어야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반대로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기도하고, 순종하며, 회개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의무를 낳지만, 의무가 사랑을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을 이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보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더 사랑할 수 있습니다. 건강을 주시면 감사하고, 일이 잘되면 하나님이 좋으며, 기도가 응답되면 믿음이 생깁니다. 그러나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기도 합니다. 그때 우리는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을 사랑합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사랑합니까?”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소원의 ...

새롭게 단장

 2007년에 시작되었으니 오래된 블로그다. 기존의 주소를 계속 사용하려다 메타태그가 삽입되지 않아 결국 하위도메인을 입힌다. 큰 의미가 있는 블로그는 아니지만 다양한 생각을 기록할 생각이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는데 왜 인간을 시험하시는가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는데 왜 인간을 시험하시는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아신다면, 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하셨을까. 왜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시험하시고, 왜 욥이 고난의 밤을 지나게 하셨을까. 하나님이 인간의 마음을 이미 알고 계신다면 시험은 불필요해 보인다. 마치 답을 알고 있는 교사가 굳이 시험지를 나누어 주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시험은 하나님이 새로운 정보를 얻는 과정이 아니다. 시험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마음을 알아내시는 시간이 아니라, 인간이 자기 마음을 발견하는 시간이다. 하나님은 이미 알고 계시지만, 우리는 알지 못한다. 믿는다고 말하지만 얼마나 믿는지 모르고, 사랑한다고 고백하지만 무엇을 더 사랑하는지 알지 못한다. 시험은 숨겨진 마음이 삶의 표면으로 올라오는 순간이다. 시험과 유혹은 다르다 성경에서 시험을 말할 때 먼저 구분해야 할 것이 있다. 하나님은 인간을 시험하시지만, 죄를 짓도록 유혹하지는 않으신다.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약 1:13). 야고보서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악으로 끌어당기지 않으신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시험의 목적은 넘어뜨리는 데 있지 않고 드러내고 연단하는 데 있다. 반면 사탄의 유혹은 인간을 하나님에게서 떼어 놓고 파괴하려 한다. 같은 상황도 목적에 따라 전혀 달라진다. 광야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을 신뢰하도록 배우는 시험의 장소였지만, 동시에 불평과 우상숭배로 끌어가는 유혹의 장소이기도 했다. 불은 금을 정련하기도 하고 마른 풀을 태우기도 한다. 무엇을 향해 불이 놓였는가가 중요하다. 시험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을 위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하신 뒤 말씀하셨다.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 22:12).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만 읽으면 하나님...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어떻게 믿을 수 있나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어떻게 믿을 수 있나요?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믿을 수 있나요?”라는 질문은 신앙이 없는 사람만 하는 질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진지하게 믿으려는 사람이 반드시 한 번은 마주하게 되는 질문입니다. 눈으로 볼 수 없고 손으로 만질 수도 없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때로 막연하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먼저 성경은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분이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하나님은 물질로 이루어진 존재가 아니며, 시간과 공간 안에 갇혀 계신 분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은 영이시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영이신 하나님은 우리 눈에 보이는 사물처럼 관찰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일상에서도 보이지 않는 많은 것을 믿고 살아갑니다. 사랑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사랑하는 사람의 행동과 희생을 통해 그 존재를 압니다. 바람은 보이지 않지만 흔들리는 나뭇잎을 통해 바람이 불고 있음을 압니다. 사람의 마음도 직접 볼 수 없지만, 말과 표정과 선택을 통해 그 마음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자체를 우리의 육안으로 볼 수는 없지만, 하나님이 행하신 일과 나타내신 흔적을 통해 그분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창조 세계가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을 드러낸다고 말합니다. 하늘과 별, 계절의 순환, 생명의 질서와 인간의 양심은 우연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깊은 신비를 품고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낸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단순히 자연을 보고 막연히 어떤 신이 있다고 믿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가장 분명하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육체가 곧 하나님 아버지의 모습이라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의 인격과 말씀과 행동 속에서 하나님의 성품이 완전하게 드러났다는 의미입니다. 병든 사람을 불쌍히 여기시고, ...

믿음과 우울은 함께 존재할 수 있는가

  믿음과 우울은 함께 존재할 수 있는가 어떤 그리스도인은 우울한 자신을 보며 두 번 아파한다. 한 번은 마음이 어두워서 아프고, 또 한 번은 믿는 사람이 우울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 때문에 아프다. “하나님을 믿는데 왜 아무런 기쁨이 없을까요?” “기도해도 마음이 가라앉지 않는 것은 제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인가요?”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항상 감사하고 평안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러나 먼저 분명히 말하고 싶다. 우울하다고 해서 믿음이 없는 것은 아니다. 믿음과 우울은 한 사람의 내면에 함께 존재할 수 있다. 믿음은 영혼이 언제나 밝은 감정 속에 머무는 상태가 아니며, 우울은 단순히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해서 생기는 감정도 아니다. 우울은 단순한 슬픔과 다르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기분이 가라앉을 때 “우울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임상적 우울증은 잠시 찾아왔다가 사라지는 슬픔과 다르다. 지속적인 우울감이나 흥미의 상실이 수면, 식사, 집중력, 일과 관계 등 일상생활 전반에 영향을 줄 수 있으며, 유전적·생물학적·환경적·심리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 따라서 우울을 오직 영적 문제로만 해석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사람은 영혼만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몸과 마음과 관계와 기억을 지닌 하나의 전인적 존재이다. 몸이 병들면 마음이 지칠 수 있고, 오랜 상실과 관계의 상처가 신체의 리듬까지 무너뜨릴 수 있다. 반대로 수면 부족과 신체적 질환, 과도한 스트레스가 감정과 사고에 영향을 주기도 한다. 그러므로 우울한 사람에게 “기도를 더 하라”고만 말하는 것은, 다리가 부러진 사람에게 믿음으로 걸으라고 재촉하는 것과 비슷할 수 있다. 기도는 필요하지만, 기도가 치료와 상담과 휴식을 배제하지 않는다. 성경의 믿음은 슬픔을 감추지 않는다 성경에는 어두운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섰던 사람들이 적지 않다. 욥은 자신이 태어난 날을 저주했고, 예레미야도 자신의 출생을 탄식했다. 시편의 시인은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라고 스스...

하나님을 믿는데도 왜 불안할까요?

하나님을 믿는데도 왜 불안할까요? 먼저 이것부터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불안하다고 해서 믿음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도 흔들리고, 두려워하고, 잠을 이루지 못할 수 있습니다. 불안은 언제나 신앙의 실패를 뜻하지 않습니다. 때로 불안은 몸과 마음이 지쳐 있다는 신호이고, 오래 참아 온 감정이 이제야 모습을 드러내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성경의 사람들도 불안했습니다. 다윗은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라고 스스로에게 물었습니다.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큰 승리를 경험한 뒤에도 두려움에 사로잡혀 광야로 도망갔습니다. 예수님도 겟세마네에서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불안은 하나님이 없다는 증거가 아니라, 우리가 연약한 인간이라는 증거 에 더 가깝습니다. 믿음은 감정을 없애는 능력이 아닙니다 많은 신앙인은 자신도 모르게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믿는다면 불안하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믿음에 대한 지나치게 이상화된 생각입니다. 믿음은 두려움을 전혀 느끼지 않는 상태가 아닙니다.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이 있다고 해서 심장이 빨리 뛰지 않는 것도 아니고, 미래가 갑자기 분명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믿음은 불확실성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불확실성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법을 배우는 과정입니다. “나는 왜 아직도 불안하지?”라고 자신을 책망하기보다 이렇게 말해 보십시오. “나는 지금 불안하지만, 이 불안한 모습 그대로 하나님 앞에 갈 수 있다.” 하나님은 흔들리지 않는 사람만 받아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의 기도는 흔들리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드린 말들로 가득합니다. 불안은 믿음의 문제만이 아닐 수 있습니다 불안에는 여러 층위가 있습니다. 어떤 불안은 미래를 통제하려는 마음에서 옵니다. 어떤 불안은 과거에 받은 상처에서 옵니다. 버림받았던 경험, 실패했던 기억, 사랑받지 못했던 감정이 현재의 작은 사건을...

기도해도 현실이 바뀌지 않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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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해도 현실이 바뀌지 않는 이유 기도했는데도 현실이 그대로일 때가 있다. 병은 낫지 않고, 관계는 회복되지 않으며, 닫힌 문은 좀처럼 열리지 않는다. 사람들은 기도하면 길이 생긴다고 말하지만, 어떤 사람은 오래 기도하고도 여전히 같은 방, 같은 문제, 같은 슬픔 속에 머문다. 그때 우리는 묻게 된다. 하나님은 정말 내 기도를 들으시는가. 들으신다면 왜 아무것도 바꾸지 않으시는가. 우리는 대개 기도를 현실을 변화시키는 수단으로 생각한다. 기도하면 상황이 좋아지고, 고통이 줄어들며, 원하는 결과가 주어질 것이라 기대한다. 물론 성경에는 기도를 통해 병이 낫고, 길이 열리고, 원수가 물러간 사건들이 있다. 그러나 성경의 모든 기도가 현실의 즉각적인 변화로 이어진 것은 아니다. 바울은 자신의 육체에 있는 가시가 떠나기를 세 번 간구했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제거하지 않으셨다. 대신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 말씀하셨다. 문제는 남아 있었지만, 문제를 견딜 수 있는 은혜가 주어졌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기도의 본질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기도는 하나님을 설득하여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현실을 움직이는 행위가 아니다. 기도는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내 욕망과 두려움과 기대를 드러내고, 그분의 뜻 안에서 다시 나를 바라보는 일이다. 현실이 변하지 않는다고 해서 기도가 실패한 것은 아니다. 때로 기도의 가장 깊은 응답은 환경의 변화가 아니라 기도하는 사람의 변화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외부의 조건이 달라지면 평안해질 것이라 생각한다. 돈이 생기면, 사람이 돌아오면, 병이 나으면, 일이 해결되면 비로소 살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은 하나의 문제가 해결되면 또 다른 문제를 만들어 낸다. 현실이 변한다고 해서 인간의 불안이 자동으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때로 우리가 원하는 것을 즉시 주시기보다, 그것이 없어도 무너지지 않는 사람으로 우리를 빚으신다. 기도는 현실을 피하는 일이 아니라 현실을 견디는 힘을 얻는 일이다. 예수께서 겟세마네에서 “...

하나님의 침묵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처럼 느껴질 때 기도가 허공을 맴도는 것처럼 느껴지는 날이 있다.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고, 성경을 펼쳐도 문장은 눈앞에서 미끄러진다. 사람들은 기다리면 된다고 말하지만, 기다림 속에 있는 사람에게 시간은 언제나 너무 느리다. 하나님의 침묵은 단순히 소리가 들리지 않는 상태가 아니다. 그것은 내가 믿어 온 모든 것이 흔들리는 경험이며, 내가 붙들고 있던 신앙의 언어가 힘을 잃는 순간이다. 시편의 시인들도 이 침묵을 알고 있었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라고 부르짖었던 시편 13편의 고백은, 믿음 좋은 사람의 흔들리지 않는 확신보다 오히려 더 진실하다. 성경은 인간의 절망을 감추지 않는다. 믿음은 아프지 않은 상태가 아니라, 아픈 채로 하나님을 부르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을 때에도 하나님을 향해 질문하는 것, 그것이 어쩌면 가장 처절한 믿음일 수 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의 응답을 사건의 변화로만 이해한다. 병이 나아야 응답이고, 문제가 풀려야 은혜이며, 길이 열려야 인도하심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제나 환경을 먼저 바꾸시는 분은 아니다. 때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시간 속에서, 우리 자신을 바꾸신다. 바깥의 문이 닫혀 있을 때 마음속에 새로운 문을 여시고, 문제가 그대로 남아 있을 때 그것을 바라보는 눈을 새롭게 하신다. 침묵은 부재가 아니다. 침묵은 때로 가장 깊은 임재의 방식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곁을 지킬 때 우리는 반드시 많은 말을 하지 않는다. 말보다 더 깊은 동행이 있기 때문이다. 십자가 위의 예수께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외치셨을 때, 하늘은 즉시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침묵 속에서 구원은 완성되고 있었다. 인간의 눈에는 버림받음처럼 보였지만, 하나님의 뜻은 가장 깊은 곳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철학자들은 침묵을 존재의 빈자리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신앙에서 침묵은 텅 빈 공간이 아니라, 인간의 욕망과...

현대 기독교인을 위한 기독교 칼럼 주제 50가지

  현대 기독교인을 위한 기독교 칼럼 주제 50가지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처럼 느껴질 때 기도해도 현실이 바뀌지 않는 이유 신앙인은 왜 여전히 불안한가 믿음과 우울은 함께 존재할 수 있는가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외로운 사람들 상처받은 마음으로 교회에 머무는 법 교회 안에서 받은 상처는 어떻게 치유되는가 신앙생활을 오래할수록 사랑이 식는 이유 하나님보다 사람의 인정을 구하는 신앙 믿음이 습관이 되어 버렸을 때 예배가 감동적이지 않아도 예배해야 하는 이유 기도가 의무처럼 느껴지는 날들 성경을 읽어도 마음에 들어오지 않을 때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회개는 죄책감과 어떻게 다른가 용서했지만 다시 가까워질 수는 없는 관계 그리스도인은 모든 사람과 잘 지내야 하는가 사랑한다는 이유로 참아야만 하는가 관계를 끊는 것도 믿음일 수 있는가 착한 사람이 되는 것과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감정을 억누르지 말라 분노하는 그리스도인은 믿음이 없는가 질투와 비교에서 자유로워지는 신앙 성공한 사람을 부러워하는 마음에 대하여 실패를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인다는 것 응답받지 못한 기도는 어디로 가는가 기다림이 길어질 때 믿음은 어떻게 변하는가 늦게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뜻을 모를 때 선택하는 법 모든 일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의 위험성 고난을 무조건 축복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고통받는 사람에게 쉽게 위로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 하나님은 왜 선한 사람에게도 고난을 허락하시는가 상실 이후에도 믿음을 지킬 수 있는가 죽음을 생각하며 오늘을 살아가는 법 돈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돈을 벌 수 있는가 부자가 되는 것은 신앙적으로 잘못인가 가난을 미화하지 않는 기독교 신앙 직장에서 그리스도인답게 산다는 것 경쟁 사회에서 신앙을 지키는 방법 바쁜 삶 속에서 영혼을 돌보는 법 스마트폰 시대의 침묵과 묵상 소셜미디어 속 신앙과 자기 과시 온라인 예배는 진정한 예배가 될 수 있는가 교회가 세상과 닮아 갈 때 교회 공동체에 꼭 속해야 하는가 신앙을 잃어버린 자녀를 바...

참 오래된 블로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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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 글이 2007년 그런데 아직 마흔 개도 적지 않은 블로그. 이유도 있다. 이전에는 그냥 몰라서 안 적있고, 그 다음은 색인이 거의 되지 않아 안 적었고, 최근에는 네이버에 등록되지 않아 방치 되었다. 오늘 보니 구글 서치콘솔에도 등록해 놓지 않아 방금 등록해 했다. 무엇 때문에 만든 건지. 그냥 우연히 만들어 놓고 벌써 18년이 흘렀다. 허걱 정말 어마어마하다. 만약 하루에 1포씩 했다면 거의 7천포 가까이 된다는 말이네.. 역시 시간의 힘은 대단해. 만약 여기에 계속을 글을 썼고, 애드센스 승인이 되었다면 많은 돈을 벌었을 것이다. 지금은 어떤가? 챗봇도 생기고 검색도 거의 사라지고 시대가 너무 많이 변했다. 그래도 내 생각은 지피티를 활용해서 적어 나갈 생각이다. 이유야 어째뜬 간에 말이다.

골방기도란 무엇인가요?

골방기도란 무엇인가요? 골방기도는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과 단둘이 마주하는 은밀한 기도 를 뜻합니다. 이 표현은 예수님의 산상수훈에서 나옵니다.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 마태복음 6장 6절 여기서 중요한 것은 특정한 방의 형태보다 기도하는 사람의 중심과 태도 입니다. 골방은 어떤 장소인가요? 신약성경에서 골방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타메이온(ταμεῖον) 입니다. 본래 집 안쪽에 있는 창고나 은밀한 방, 외부의 시선이 잘 닿지 않는 공간을 가리킵니다. 당시 일반 주택에서 가장 사적인 공간에 가까운 곳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골방기도는 문자적으로는 조용한 방에서 혼자 드리는 기도를 의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집에 별도의 기도방이 있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차 안, 산책길, 교회 한쪽 자리, 새벽의 책상 앞도 골방이 될 수 있습니다. 주변에 사람이 있더라도 마음을 하나님께 집중할 수 있다면 그곳 역시 영적인 골방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왜 골방에 들어가라고 하셨나요? 예수님 당시 일부 종교인은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회당과 거리에서 기도하기를 좋아했습니다. 문제는 공개적인 기도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성경에는 공동체가 함께 드리는 기도도 많이 나옵니다. 문제는 누구에게 보이기 위해 기도하느냐 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에게 경건한 사람으로 인정받기 위해 기도하는 태도를 경계하셨습니다. 기도가 하나님과의 대화가 아니라 자신을 드러내는 종교적 공연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골방은 사람의 박수가 들리지 않는 곳입니다. 다른 사람이 나의 기도 실력을 평가하지 않는 곳이며, 아름다운 문장을 만들 필요도 없는 곳입니다. 그곳에서는 오직 하나님만이 기도를 들으십니다. 골방기도의 핵심은 은밀함입니다 골방기도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은밀함 입니다. 은밀한 기도에서는 자신을 꾸밀 필요가 없습니다. 교회에서는 믿음 좋은 사람처럼 보일 수...

남을 미워하지 않는 방법 7가지

  남을 미워하지 않는 방법 7가지 1) 미움을 ‘도덕 문제’가 아니라 ‘방어 정서’로 재정의하는 일이다 미움은 흔히 인격의 결함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경계 반응이다. 진화심리학 관점에서 인간은 집단 안에서 위협과 배신, 무임승차자를 빠르게 감지해 배제하도록 발달한 경향이 있다. 그러니 미움이 치밀 때 나는 나쁜 사람이 아니라 내 뇌가 위험 신호를 켠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출발점이다. 미움을 경계, 상처, 두려움 같은 단어로 바꾸어 부르면 편도체 중심의 즉각 반응이 전전두엽의 해석으로 옮겨가며 감정의 온도가 내려가는 방향으로 움직이기 쉽다. 2) ‘의도 추정’을 멈추고 ‘관찰 가능한 사실’로 이동하는 일이다 관계심리학에서 갈등은 사건 그 자체보다 해석에서 커진다. 미움은 상대의 행동에 저 사람은 원래 그런 사람이다 같은 성격 귀인과 나를 해치려 했다 같은 의도 추정을 붙일 때 굳어진다. 뇌는 애매함을 싫어해 빠른 결론으로 불안을 줄이려 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훈련할 질문은 단순하다. 그가 한 행동은 무엇인가, 내가 확인한 사실은 어디까지인가이다. 의도를 추정하는 대신 관찰된 행동만 적으면 내러티브가 줄고 적개심은 느슨해진다. 3) 생각보다 먼저 ‘신체 각성’을 낮추는 일이다 미움은 머리로만 생기는 것이 아니라 몸의 상태와 결합된 정서이다. 교감신경이 올라가 심박과 근육 긴장이 증가하면 뇌는 위험을 전제로 정보를 처리한다. 이때는 논리로 설득해도 잘 바뀌지 않는다. 먼저 길게 내쉬는 호흡, 짧은 걷기, 찬물 세수, 스트레칭 같은 상향식 조절이 필요하다. 몸이 진정되면 전전두엽의 억제 기능이 회복되어 상대를 흑백으로 재단하는 경향이 약해진다. 미움을 다스리는 첫 기술은 논쟁이 아니라 생리 조절이다. 4) 경계와 분리를 ‘비폭력적 형태’로 구조화하는 일이다 남을 미워하지 않는다는 것은 모든 것을 받아들이라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건강한 경계가 없을 때 미움이 쌓인다. 관계심리학의 핵심은 좋아함보다 규칙이다. 싫은 행동을 구체적으로 말하고(예: 늦은 밤 ...

하루를 살아가는 7가지 지혜

하루를 살아가는 지혜는 거창한 결심이 아니라, 오늘이라는 작은 시간에 무엇을 붙들지 정하는 기술이다. 고대의 현자들은 인간이 흔들리는 존재임을 정직하게 보았고, 현대의 사람들은 그 흔들림을 다루는 도구를 만들었다. 둘을 엮으면, 하루를 버티는 처방이 아니라 하루를 세우는 지혜가 된다. 첫째, 아침에 뜻을 세우는 일이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하루를 맞을 때 마음의 ‘방향’을 먼저 정하라고 말한 셈이다. 오늘 겪을 수 있는 불편, 갈등, 유혹을 미리 떠올리고도 흔들리지 않겠다는 결의를 세우는 일이다. 현대의 습관 연구가 말하는 “의도 설정”도 같은 결이다. 오늘의 가장 중요한 한 문장을 정하는 것이다. 나는 오늘 무엇을 위해 이 시간을 쓰는가, 이 질문에 답이 있는 날은 휘둘리지 않게 되는 날이다. 둘째, 욕망을 다스리는 기술이다. 플라톤이든 불교의 수행자든 인간의 내면에는 끌림과 충동이 있고, 그것이 삶을 흔든다고 보았다. 현대인은 이를 ‘도파민’이라는 언어로 말하며, 자극의 과잉이 집중과 만족을 갉아먹는다고 말한다. 그러니 하루에 한 번은 자극을 줄이는 결단이 필요하다. 알림을 끄고, 화면을 내려놓고, 짧은 고요를 확보하는 일이다. 욕망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욕망의 운전대를 다시 잡는 일이다. 셋째, 할 일을 줄이는 용기이다. 노자는 ‘비움’의 지혜를 말했고, 많은 현자들은 과잉의 삶이 사람을 불안하게 만든다고 보았다. 현대의 생산성 담론도 결국 “선택과 집중”을 말한다. 하루에 핵심 과업을 하나로 좁히는 것이 지혜이다. 오늘 반드시 해야 할 한 가지를 정하고, 나머지는 ‘안 하는 목록’에 넣는 일이다. 삶은 무엇을 더 하느냐보다 무엇을 덜 하느냐로 선명해지는 날이 많다. 넷째, 관계를 정돈하는 일이다. 공자는 인간을 관계적 존재로 보았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좋은 삶을 위해 우정과 공동체를 중요하게 여겼다. 현대 심리학도 사회적 연결이 행복과 회복탄력성에 깊게 관련된다고 말한다. 그래서 하루의 지혜는 관계에서 드러난다. 짧더라도 먼저 안부를 묻고, 감사 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