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의 게시물 표시
가인 : 유리하는 저주 “땅(아다마)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아다마)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네가 밭 갈아도 땅(아다마)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아레쯔)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라 되리라” (창 4:11,12) 아다마는 사람(아담)을 창조하신 곳이다. 그 땅이 아벨의 피를 받아 가인은 아다마로부터 저주를 받아 아다마가 다시는 그 효력을 주지 않게 되었고, 아레쯔에서 피하며 유리(방황)하는 자가 된다. 흙에서 나온 사람은 이제 흙에서 분리되어 쫓겨 다니는 신세가 되었다.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아 다니는 것은 몹시 피곤한 여행이다. 타락한 인간이 받은 저주도 정든 고향-에덴동산을 떠나는 것이었다. 혈기로 세겜 사람들을 죽인 시므온과 레위가 받은 저주도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아 다니는 것이었다.(창49:7) 모세의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을 불신함으로 40년 동안 광야를 유리하는 벌을 받게 된다. 역마살이----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본성적으로 외롭고 고독한 존재가 되었으며, 평안과 안정을 잃어 버렸다. 어거스틴은 그의 참회록에서 하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평안이 없었다고 고백했다. 가인이 받은 저주는 영혼의 안식의 상실이다. 그는 땅에서 유리하며 방랑의 삶을 살아야 한다. 그가 것한 놋은 ‘유리하는 곳’이다. 그는 그곳에 하나님의 저주를 이기고자 성을 쌓고 에녹이라고 명했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평안이 없다. 어거스틴은 하나님께 돌아가서야 참된 평안을 얻었다. 하나님 안에 평안이 있는 영혼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혼을 보호하시고, 참된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하나님과 교제하도록 만들었다. 하나님 없이는 인간의 영혼은 불안하며, 두려워하며, 피곤한다.
이미지
폴 리쾨르의 기독교인의 역사참여 역사와 진리지은이폴 리쾨르출판사솔로몬출간일2006.3.20장르인문책 속으로역사와 진리라는 두 가지 기본 개념을 체계적으로 다룬 책. 진리와 역사가 보존하고 있는 두 개의 관계, 즉 인식론적이고 실천적인 관계를 지칭하는 '역사 인식과 진리'와 '역사적 행동과 진리'를 살펴본다. 제1부에서는 철학자...나의 평가이 책은..Ⅰ. 서론 역사 연구는 물음으로 시작한다. 물음 없는 역사 연구는 무의미이다. 역사에 대한 물음은 실존의 의미를 찾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역사에 대한 물음은 인간 실존에서 시작하여 소망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전제를 가진다. 역사 읽기는 다음의 세 가지를 가지고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것은 진보, 모호성, 소망이다. 진보는 추상적인 것이며, 모호성은 실존적이며, 소망을 신비적이다. 이 세 가지는 역사를 읽어 나감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이다. 진보 역사는 진보하는가? 아니면 변혁하는가는 아주 오래된 질문 가운데 하나이다. 진보라는 개념이 가능한 것은 퇴보의 반대편에서 계속하여 보다 더 나은 것으로 나아간다는 것을 전제해야 한다. 진보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도구’ 그리고 ‘축적’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 모든 것들은 경험 acquis이다. 지식도 여기서 예외는 아니다. 구체화 시키면 그것은 활자요, 인쇄물이다. 이것들은 지식이 축적되고 쌓여지도록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수단들로 인하여 지식은 역진(逆進)하지 않는다. 인간들은 이 축적된 지식을 통하여 그 위에 또 다른 지식을 쌓아감으로 역사를 진보시킨다. 그런 의미에서 역사는 단수이며, 단일한 것이다. 다양성을 가지고 역사는 나아가지만 진보라는 측면에서 역사의 다양성은 필연적으로 단일함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지식의 축적은 인간이 살아간 ‘자취’이며 그 자취는 다음 세대에는 진보의 땔감으로 사용된다. 기술사, 과학사, 지식사는 동일한 방법과 방향으로 나아간다. 이러한 진보들은 인간의 삶을 위한 도구들이다. 의식의 영역에...
이미지
한국인 최초의 기독교 신자 가운데 한 사람인 백홍준(白鴻俊)은 1848년에 평북 의주(義州)에서 태어났으며 호는 북산(北山)이다. 상인이었던 그의 아버지가 1874년 10월경 만주의 통화현(通化縣) 고려문(高麗門)을 방문하였다가 영국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선교사인 로스(Ross, J.·羅約翰)목사를 만나 한국 정세와 발음법을 가르쳐주고 한문으로 된 신약성경과 '훈아진언'(訓兒眞言)이라는 소책자를 받아온 일이 있었다. 아버지가 가져 온 책자를 몇몇 친구들과 함께 2∼3년간 공부한 다음 북산은 1879년 순전히 '교리를 배울' 목적으로 로스목사를 찾아 만주 우장(牛莊)으로 갔는데, 그때는 로스목사가 안식년 휴가를 맞아 조국인 영국으로 귀국하고 없었다. 대신 같은 선교회 소속인 매킨타이어(MaIntyre, J.·馬勤泰) 목사가 그를 맞이하였고, 그곳에서 북산은 구도자로서 3,4개월을 지냈다. 마침내 그는 신앙을 고백하고 친구인 이응찬(李應贊), 이성하(李成夏), 김진기(金鎭基) 등과 함께 세례를 받고 기독교 장로교회의 신자가 되었다. 이 네 사람은 한날 한시 한꺼번에 세례를 받은 것이 아니라 시차를 두고 받았으며, 이름이 전하지 않는 첫 세례인이 배출된 직후에 북산이 두 번째로 세례 받았다고 전해진다. 그 후 그는 친구들과 함께 다시 만주로 돌아 온 로스목사가 주도하는 중국의 한문성경을 우리말로 번역하는 작업에 서너달동안 착수하였다. 이처럼 여러 명의 한국인들이 힘을 모아 나라 밖에서 한글로 성서를 번역했다는 일 자체가 바로 한국기독교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이즈음 1880년 의주에 있던 10여명의 구도자들의 요청에 따라 매킨타이어 목사가 북산을 시켜 성경과 소책자 한 상자를 보낸 일이 있었다. 그랬는데 그가 머무르던 국경지역의 여관에서 짐보따리를 수상히 여긴 주인의 신고로 관헌에 의해 압수되고 동봉한 편지가 발각되어 약 3개월간 투옥된다. 당시 나라에서 금하던 천주교신자가 아닌 까닭에 풀려 나오기는 했지만 이로인해 북산은 거의 모든 ...
이미지
남편 닥터 윌리암 제임스 홀 선교사와 결혼한지 3년만에 여의고, 3년후 남편의 전기를 편저하였다. 그녀는 한국에 남편 보다 1년 먼저 와(1890), 43년간을 한국을 위해 봉사하였으며 우리나라에 여러 '최초'를 기록해 놓은 인물이다. 평양에 최초의 병원 설립, 맹인 농아학교 설립, 점자도입(뉴욕 포인트)과 한글용 점자개발, 어린이 병동설립, 여자의학교 설립(경성여전, 수도의대, 우석의대를 거쳐 현재 고려대 의대가 됨), 동대문병원(현 이대부속병원), 인천 기독교병원, 인천간호보건대학 등 설립, 또는 시작하였다. 또 한국의 최초여의사(서양의학), 김점동(에스더 K.박)을 키웠고, 한국여성의 인권을 위해서도 일하였다. 그녀는 미국에서 뛰어난 미국여성 200인중 한사람으로 인정을 받았다. 남편 제임스 홀(William James Hall,1860-1894,한국명,忽,혹은 賀樂은 카나다 출신 미감리회 의료선교사이며 목사다. 몬타리오주 글렌 뷰엘(Glen Buel)에서 장로교인이며 석공인 죠지 홀의 맏이로 통나무집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열심히 교회에 다녔으며 14세때 거듭나는 체험을 하였다. 1881년 아덴(Athen)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교사자격증을 받아 2년간 교사로 일하였다. 1885년 퀸즈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하였으나 중도에 뉴우요오크의 벨레뷰(Bellevue)병원 의과대학으로 옮겨 1889년 이 학교를 졸업하고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졸업하자마다 곧 미감리회에서 추천하는 뉴우요오크 빈민가 선교사업에 참여하였는데 이곳에서 셔우드(Rosetta Sherwood)를 만나 사랑하게 되었고 이들은 한국 의료선교사로 파송되어 1892년 6월27일 한국에서 결혼하였다. 평양에서 의료 선교를 하던 제임스 홀은 과로가 겹쳐 말라리아에 걸렸다. 병세가 심하여 서울에 있는 아내 로제타 홀에게 가기 위하여 대동강을 따라 40마일쯤을 내려가서 배를 탔다. 제물포에 도착했을 때 발진티프스가 발행하였다. 1894년 11월 19일 서울에 도착한 소...
이미지
진짜 크리스천 미국 피츠버그에서 만난 성도님의 이야기다. 미국 유학 후 미국에서 직장을 얻어 30년 동안 엔지니어로 일하고 있는 그분은, 지난 세월 동안 상사나 주위 사람으로부터 탈법 혹은 부당 행위를 지시받거나 요구당한 일이 단 한 번도 없었다고 했다. 몇 해 전 그는 한국 관계 기관으로부터 경부고속전철 공사와 관련된 자문을 부탁받고 귀국했다. 그러나 그는 몇 달 지나지 않아 계약 기간이 만료되기도 전에 스스로 계약을 포기하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가 참을 수 없었던 것은 부당한 청탁을 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그가 교회 장로임을 아는 크리스천들이었다는 것이다. 크리스천이, 크리스천에게, 크리스천이기 때문에, 봐 달라고 부당 청탁을 한 것이다. 그들이야말로 이 땅에 사는 크리스천들의 보편적인 모습이다. 2002년 10월, KBS 텔레비전의 ‘현장 출동’에서 세관 수사원들의 삶을 다룬 적이 있었다. 밀수꾼을 잡기 위해 정보가 입수되는 대로 전국을 추격의 무대로 삼아 밤낮을 가리지 않는 그들의 수고는 눈물겹기까지 했다. 젊은 세관원이 압수된 시계를 철판 위에 올려놓고 쇠망치로 일일이 깨부수었다. 그때 취재하던 PD가 아깝지 않느냐고 묻자, 그의 대답이 이랬다. “아까워 보이죠? 그러나 이게 아까우면 이 자리를 지킬 수 없어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여겨야 할 수 있죠.” 그렇다. 세상의 것이 아까우면 진짜 크리스천의 자리를 지킬 수 없다. 진짜 크리스천이란 교회 안팎에서 주님의 말씀을 좇아 사는 것을 당연히 여기는 자다. 「인간의 일생」/ 이재철
이미지
“광야 길을 따라서” 행전 8:26-40 류호준 목사 [성경본문] 주의 사자가 빌립에게 말하여 이르되 “일어나서 남쪽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 하니 그 길은 광야라. 일어나 가서 보니 에티오피아 사람 곧 에티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관리인 내시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돌아가는데 수레를 타고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더라. 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이 수레로 가까이 나아가라” 하시거늘 빌립이 달려가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 읽는 것을 듣고 말하되 “읽는 것을 깨닫느냐?” 대답하되 “지도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냐?” 하고 빌립을 청하여 수레에 올라 같이 앉으라 하니라. 읽는 성경 구절은 이것이니 일렀으되, “그가 도살자에게로 가는 양과 같이 끌려갔고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 양이 조용함과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가 굴욕을 당했을 때 공정한 재판도 받지 못하였으니 누가 그의 세대를 말하리요. 그의 생명이 땅에서 빼앗김이로다” 하였거늘 그 내시가 빌립에게 말하되 “청컨대 내가 묻노니 선지자가 이 말한 것이 누구를 가리킴이냐? 자기를 가리킴이냐? 타인을 가리킴이냐?” 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 길 가다가 물 있는 곳에 이르러 그 내시가 말하되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냐?” 이에 명하여 수레를 멈추고 빌립과 내시가 둘 다 물에 내려가 빌립이 세례를 베풀고 둘이 물에서 올라올 새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간지라. 내시는 기쁘게 길을 가므로 그를 다시 보지 못하니라. 빌립은 아소도...
이미지
“향기로운 삶의 일급 비결” 빌 4:1-20 류호준 목사 [성경본문] 1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 2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3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여인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5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8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9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10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12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마5:5 복 ; 마카리오스 70인역에 의하면 이 복은 히브리어 아쉬레의 번역어 이 단어는 외적인 번영 즉 정치 경제 물질 등의 번영을 뜻하는 단어이다. 천국 (바실레이아.. 나라가 아닌 왕국 즉 왕이 다스리는 나라이다.) 이 지금 있다. 에스틴-현재시제이다. 오늘 이 말씀에는 놀라운 역설이 담겨있습니다. 가난한한자, 즉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을 향하여 예수님을 복이 있다고 선언하십니다. 가난은 궁극적으로 죄의 결과로 일어나는 궁핍의 현상으로 하나님의 저주로 인식된다. 예수님은 구약의 하나님의 저주로 인식되는 가난한 자를 향하여 복을 선어하고 있는 것이다. 복은 부자들에게 주어지는 구약의 선언이다.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 것이며, 비상식적이다. 외형적인 번영의 복이 가난한 자에게 있다는 것은 말이 안되는 것이다. 그런 비논리를 사용하여 주님은 저주를 축복으로 전복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 선언은 청중들로 하여금 충격을 받게하고 놀라게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즉시 이 질문을 할 것입니다. “왜?” “어떻게 가난한 자가 부자이며, 저주받은 자가 복이있단 말인가?” 주님은 그 답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지금 그들에게 천국이 있기 때문이다” 즉 그들이 지금 천국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가장 부자이고, 복이 있는 자들이다라는 것이다. 이 말씀도 쉽게 수용하기 힘든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에게 천국은 먼미래의 일이며, 정치적인 독립을 쟁취하여 온전한 나라를 이루는 것은 천국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식민지의 상태이고, 또한 육신의 몸을 입고 있는데 어떻게 천국이 지금 있단 말인가라고 의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물었습니다. “주님 언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겠습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여기있다. 저기있다 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지금(에스틴-현재분사로 지금있다는 뜻이다) 있기 때문이다” (눅17:20-21) 주님의 이 선포는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선포보...
루터의 십자가 신학 십자가만이 우리의 신학이다.(Crux sola est nostra theologia) 이 말은 루터의 신학을 대변하는 것이다. 루터는 창조신학을 통하여 하나님을 찾아가려는 이성의 어리석음을 비판하고 하나님 오직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서 발견되어 질수 있다고 선언한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지혜이며, 능력이다. 십자가가 루터 신학의 중심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십자가만이 인류의 유일한 소망이며, 하나님을 체험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자신을 창조된 피조물을 통하여 계시하신다. 그러나 타락한 이후 인간은 피조세계를 이성의 힘으로 올바르게 바라볼 수 없게 되어 창조세계는 더 이상 하나님을 바라 볼 수 있는 통로가 되지 못한다. 오직 인간의 실존 세계에 오셔서 직접 인간이 되셔서 죽음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다. 그 외의 방법은 없다. 이것이 루터의 십자가 신학이다. 루터가 왜 십자가 신학을 주장하게 되었는지를 그의 생애를 통하여 간략하고 살펴보고, 소위 ‘탑속의 경험’과 하이델베르크 논쟁을 중심적으로 그 안에 담겨진 루터의 십자가 신학사상을 살펴보자. Ⅰ. 루터의 생애 1. 루터의 출생과 어린 시절 15세기 말 만스펠트의 공작령인 아이스레벤에서 루터는 출생했다. 정확히 1483년 11월 10이었다. 루터의 할아버지 즉 루더(Luder) 가정은 아이스레벤 근처에 있는 뫼라(Moehra) 출신의 농부였다. 루터의 부친인 한스(Hans)는 루더의 네 아들 가운데 장남이었고, 그러나 막내가 부친의 농가를 물려받았기 때문에 1483년 가을 아이제나흐의 린데만 출신인 부인 가마레트와 함께 만스펠트의 공작령안에 있는 아이스레벤으로 이사갔다. 아이스레벤은 새로운 구리광이 발굴되어 많은 일꾼들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쉽게 광부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 해 11월 10일 자정 무렵에 그의 둘째 아들이 태어났고, 마틴(Martin)이란 세례명을 주었다. 그러나 이곳에서 한스는 별다른 이익을 얻지 못한 채...
시편 8편 시편 8편보다 더 아름다운 시가 존재할까? 무엇보다 시편 8편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을 노래하고 있다. 우연일까? 여호와로 시작하여 여호와로 끝나고, 하늘에서 시작하여 땅에서 마무리한다. 이것은 마치 창세기 1:1절을 읽는 듯한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천- ~yIm'(V'h(2,히브리성경기준), 지- #r 이것은 하늘과 땅 모두를 하나님이 다스린다는 뜻은 아닐까? 2절의 이상한 구절은 우리 예수님께서 유대 종교지도자들을 비판하실 때 사용하신 것인데 정확한 의미를 잘 모르겠다. 여기서 보여지는 것은 원수와 보수자가 어린아이보다 못한 존재로 그려진다는 것이다. 화려한 수사학과 세상의 많은 지식과 교활함으로 무장한다고 할찌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은 어린아이의 순수하고 단순한 말을 사용하여 이기게 할 수 있다는 역설은 아닐까? 3~8절까지는 4,5절을 중심으로 동심구조를 가지고 있다. 3절 하늘의 피조물, 4절 인간, 5절 인간, 6-8절은 땅의 피조물, 또한 하늘의 피조물은 하나님의 권능을 말하고, 6-8절은 땅의 피조물을 다스리는 인간의 권능을 말하고 있는 듯하다. 하늘은 하나님의 주관이시지만, 땅의 것은 인간에게 다스리도록 하셨다. 그럼에도 이 모든 것은 처음과 끝이, 하늘과 땅이 모두 여호와(1,9절)의 것이라는 사실도 보여준다.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여호와 하나님께서 어린아이와 같이 연약하고, 보잘것 없는 인간은 그토록 사랑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 온 우주에 가득한 여호와의 영광, 그것은 인간의 편에서 볼 때 주눅들하고 겁나게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을 안다면, 오! 하나님의 당신의 그 지혜와 사랑을 어찌다 말로 표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아직도 주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묻는다. ‘사랑이 구주를 죽게 했네, 왜 날 사랑하나, 왜 날 사랑하나’ 4절에서 사람은 에노스이고, 5절의 천사는 엘로힘이다. 왜 그렇게 번역했는지 유감이다.
시편 5편 영어NIV 표현이 특이하다. Give ear to my words, O LORD 1절과 2절이 상이한 단어들이 반복적으로 사용된 것을 보니, 다윗의 마음이 얼마나 애타게 하나님을 찾고 있는지를 알 것 같다. (1-2) 아침에 기도한다? 아직 만남이나 새로운 일이 시작되지 않는 아침에, 원수를 갚아 달라는 기도는 도대체 무슨 말인가? 정말 이것이 사실이라면 주인공은 밤에 한 숨도 자지 못하고 그 긴긴 밤을 새하얗게 지새웠을 것이다. 분노는 해 질녁까지 풀지 않으면 안된다는 충고를 모르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분을 풀지 않으면 밤새도록 잠을 자지 못하기 때문이다.(3) 주인공은 악인들의 죄를 들추고 있다.(4,5,9) 그러면서도 자신은 주의 인자를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간다고 말한다.(7) 이 무슨 괴변인가? 인자가 필요하다면 주인공도 죄인이라는 뜻이다. 이 세상에 의인이 어디 있으랴. 한명도 없지 않는가! 그러나 자신은 의인의 자격으로 주의 집에 들어간단다. 원수들에 대한 그의 저주는 더해간다. 자신을 의의 길로 인도하기를 기도하고, 악인들은 그 길이 굽게하고, 자기 꾀에 빠지게 해달라고 기도한다.(8,10) 부당해 보이는 기도다. 10절 후반부부터 그 원수들이 누구인지를 말한다. 그들은 주를 배역하고, 자기의 꾀를 쫓아 행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주인공은 여호와께 피한다. 그러기에 여호와께 자신을 보호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다. 주인공은 11절과 12절에서 결론을 내리고 있다. 주에게 피하는 자는 기쁨이 있고, 주를 즐거워하고,(11) 복을 받고, 은혜로 호위함을 받는다.(12) 이 어찌 즐거운 일이 아닐까! 이 시편은 고통 속에서 울부짖는 기도로 시작하지만, 기도해 나가면서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하기 시작한다.(4-6) 이 인식은 그로 하여금 주님의 인자를 깨닫게 하여 주의 집으로 들아가게 했으며, 결국 주께 피하는 자가 참된 기쁨과 즐거움, 복을 받는 다는 것을 알고 즐거운 고백으로 마치고 있다. 기도란 이런 것이 아닐까? 비록 고통으로 인하여 부...
성만찬 1. 감사 giving of thanks 하나님의 구원 행위에 대해 감사의 글을 낭송함으로써 하나님께 특색있게 접근한 유대교로부터 유래한 유산이다. 여기서 성만찬이 유월절의 어린양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유월절의 어린양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을 상징하고 있다. 그러므로 성만찬은 감사의 의미를 갖는다. 2. 양식 초기에 성만찬은 식사와 엄밀하게 구분되지 않은 것 처럼 보인다.(고전11:21) 디다케 9-10에서도 ‘애찬’이 언급되고 있다. 아마 식사를 통하여 육적 생명을 보장받는 것처럼, 애찬을 영적인 의미로 받아 들인 것 같다. 후기에 식사와 성만찬은 분리되었다. 3. 교제 성만찬을 통하여 초대교회는 교제를 했다. 고전10:16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함이 아니냐” 떡을 뗌으로 그리스도인은 하나의 공동체이며, 그리스도의 각 지체라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역할을 담당했다. 이것은 성도간의 긴밀한 교제와 친교를 전제하는 것이다. 4. 종말의 소망 이그나티우스는 이렇게 말했다. 성만찬에 대하여 “불사의 명약이며 죽음을 물리치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영원한 생명을 낳는 해독제이다.” 그리스도의 임재는 성령의 사역을 통해서 경험된다.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전12:13)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고전11:26) 성만찬 성례전은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자들이 천국의 잔치에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하게 될 때 갖는 최후 최고의 성만찬을 미리 맛보는 것이다. 성만찬 성례전은 하나님의 모든 과거의 사역을 요약하는 것이며 창조와 최후의 종말 안에서 구속 뒤에 오는 것을 향하도록 우리를 떠민다. 상만찬 성례전은 우리의 앞에 무엇이 놓여 있는지 상상하도록 도울 뿐만 아니라 제한된 방법 속에서 그것에 참여하도록 돕는다.
사사시대는 인간들의 자유와 적극적 헌신을 최대한으로 보장한 시기이다. 왕이라는 수단으로 복종을 강요하지 않고 자기 스스로 순종하도록 자유를 보장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이 가장 드러나야할 시기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러한 기대는 실패했다(?) 불가피하게 왕정의 상태로 가야만 했다. 개개인이 자기의 소견대로 하나님께 복종한 쪽으로 가지 않고 자기의 욕망을 위한 우상숭배로 나아갔다.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에 대한 기대는 보기좋게 무너졌으며 하나님은 은혜와 갑섭이 아니고서는 결코 거룩해 질 수 없고, 구원받을 수도 없다는 것을 사사기를 명확히 그려준다. 구원은 오직 여호와께로서 온다.
인간 이해와 상담 Understanding People 성경은 인간이 자기를 믿는 것을 경계한다. 그리스도인이 확신을 가지고 사용할 수 있는 모델을 개발하는 데 따르는 필수요건으로 계시를 받아들인다면 먼저 계시가 무엇인가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 계라는 말 속에는 계시자가 존재함을 내포한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과 그분이 사고하시며 선택하시며 느끼시는 진정한 인격이라는 사실, 그리고 당신의 피조물들을 너무나 사랑하시기에 우리의 문제가 무엇이며, 그 해결책은 어디 있는지 알려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믿습니다. 계시에는 자연이라 책과 성경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인간은 자연 계시만으로는 온전히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계시가 없는 직관, 이성, 경험은 그 가치를 잃어버립니다. 칼뱅은 자연계시를 명확히 알기 위해서는 성경이라는 안경을 써야한다고 말합니다. 많은 상담가들은 성경이 절대 권위의 책이 아니라 단지 도움을 주는 책 정도로 생각하지만, 그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입니다. 왜냐하면 성경 외에는 인간의 실존에 대해 명확히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떠한 목적을 가지느냐에 따라 방법은 달라집니다. 사람들을 직접 관찰하여 그 결과로 나온 결과로 나온 개념들을 모은 것을 ‘심리학’이라고 하며, 성경을 연구하여 그 결과를 정리해 놓은 것을 ‘신학’이라고 부릅니다. 이 둘은 서로 보완적인 것입니다. 성경을 더욱 많이 연구해야 한다는 권면에 어떤 이들은 성경이 상담학을 의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불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위험한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절대적 권위의 성경을 제치고 다른 책들 즉 심리학을 근거로 한 상담학서적들 만을 연구하게 되면, 인간의 궁극적인 문제에 답을 주지 못하고 혼란에 빠집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 상담가의 많은 이들이 그리스도에게서 사람들을 멀어지게 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성경적 연구 결론과 심리학적 연구 결론이 다르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로 잠언 22:15의 어린아이에게 매질하는 것입니다. 심리학은 어떤 폭력...

조셉 얼라인, 사람들의 생각

관능적인 쾌락에 대한 사랑과 소용돌이 치는 세상 일과 세상 염려와 정욕과 애정의 틈바구니에 끼어 양심의 소리는 무마되고 있으며, 사람들은 그저 덤덤한 희망이나 말하고의레적인 후회나 결심만 할 뿐이다. 조셉 얼라인/천국에의 초대

탈북자 이순옥씨의 간증

탈북자 이순옥씨의 간증 저는 북한 함경북도 청진에서 태어나 근 50여년을 북한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주님의 은총으로 96년 아들을 데리고 남한으로 올 수 있었습니다. 저는 북한에서 태어나 북한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모르고 살았습니다. 제가 영문도 모른 채 지하 감옥소에서 모진 고문과 사형선고를 받고 사형집행을 극적으로 취소한다는 통지와 함께 정치범 수용에 보내졌을 때 수용소안에서 겪은 북한 신자들의 모습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저는 김일성 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했기 때문에 정치범 수용소에서 죄수의 신분으로 유일하게 6,000여명의 수용된 그곳의 모든 사람들에게 일을 시킬 수 있는 생산 지휘와 모든 재정업무를 맡아서 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문에 저는 많은 사람들이 일하는 작업장들을 이곳저곳 마음대로 갈 수 있었습니다. 어느날 저를 담당하는 재정부장 교도관이 저를 불러놓고 단단히 교육시켰습니다.  "너는 오늘부터 매일 어떤 공장으로 나가야 하는데 그 공장에는 미친 정신병자놈들만 모여 있다. 그 미친 정신병자놈들은 당과 수령님을 믿지 않고 하늘을 믿는 미친 자들이니 너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그곳에 가야한다. 그리고 그 미친자들하고는 절대 눈길 한번 마주치지 말아라. 그렇지 않고 네가 그 자들이 믿는 하늘을 믿게 되면 네 목숨은 여기서 끝나게 되는 줄 알아라." 그런데 거기 가서 그 사람들을 보는 순간 나는 너무 놀랐습니다. 그들은 사람의 무리같지 않았습니다. 1.500도 이상 시뻘겋게 타오르는 용광로의 고열 노동 작업장이었는데 그 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움직이는 것을 보았을 때, 무슨 짐승의 무리 같기도 하고 외계인 같기도 하고 도무지 사람의 모습은 찾아볼래야 찾아볼수가 없었습니다. 머리에 머리카락이 붙어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고, 얼굴은 해골같고 이빨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키가 다 줄어들어서 120센티,130센티 요렇게 땅에 딱 붙은 난쟁이들만 움직였습니다. 나는 가까이에 가서 그들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전 너무나 놀랐습니다. 잡혀 올 때...
성육신 (成肉身 Incarnation) 신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사건은 인류의 모든 역사의 이적 가운데 가장 큰 이적이요, 인간의 이성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사건이다. 인류의 많은 철학자들과 천재들은 이 문제를 가지고 고민을 했다. “어떻게 신이 사람이 될 수 있는가?”라고 물으면서 서로 분쟁이 일어났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은 부인하여 인간의 몸을 입지 않았다고 했고, 어떤 사람들은 신이 아니라 단지 인간 예수일 뿐이라고 했고,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냐?”고 무관심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아기 예수 앞에 엎드려 경배하고 귀한 예물을 드렸고, 찬양을 드렸다. 말씀(로고스)이신 그 분은 인간의 몸으로 인간의 역사를 뚫고 오셨고, 신성이 인성 안에 감추어져 발결할 수 없도록 비밀이 되었다. 이 비밀은 아주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보여지도록 계시되었다. 2천년 한 아기 예수의 탄생, 동물들이 거하는 곳, 가장 천한 자리, 가장 초라한 모습, 하나님이신 그 분의 출현은 이렇게 보잘 것 없고, 흠모할 것이 없고, 존경할 만한 그 어떤 것도 없이 이 땅에 내려 오셨다. 그러나 아기 예수의 탄생은 역사를 전복시키는 사건이었다. 그 분의 오심으로 인류의 역사는 멸망과 죽음과 고통에서 회복과 생명과 기쁨으로 향해 나아갔다. 이제 그 초라한 모습 속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을 보고 경배하자. 오늘은 바로 그 분을 예배하는 날이요, 찬양하는 날이요, 그 분을 기뻐하는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