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리쾨르의 기독교인의 역사참여

역사와 진리지은이폴 리쾨르출판사솔로몬출간일2006.3.20장르인문책 속으로역사와 진리라는 두 가지 기본 개념을 체계적으로 다룬 책. 진리와 역사가 보존하고 있는 두 개의 관계, 즉 인식론적이고 실천적인 관계를 지칭하는 '역사 인식과 진리'와 '역사적 행동과 진리'를 살펴본다. 제1부에서는 철학자...나의 평가이 책은..Ⅰ. 서론

역사 연구는 물음으로 시작한다. 물음 없는 역사 연구는 무의미이다. 역사에 대한 물음은 실존의 의미를 찾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역사에 대한 물음은 인간 실존에서 시작하여 소망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전제를 가진다. 역사 읽기는 다음의 세 가지를 가지고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것은 진보, 모호성, 소망이다. 진보는 추상적인 것이며, 모호성은 실존적이며, 소망을 신비적이다. 이 세 가지는 역사를 읽어 나감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이다.

진보

역사는 진보하는가? 아니면 변혁하는가는 아주 오래된 질문 가운데 하나이다. 진보라는 개념이 가능한 것은 퇴보의 반대편에서 계속하여 보다 더 나은 것으로 나아간다는 것을 전제해야 한다. 진보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도구’ 그리고 ‘축적’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 모든 것들은 경험 acquis이다. 지식도 여기서 예외는 아니다. 구체화 시키면 그것은 활자요, 인쇄물이다. 이것들은 지식이 축적되고 쌓여지도록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수단들로 인하여 지식은 역진(逆進)하지 않는다. 인간들은 이 축적된 지식을 통하여 그 위에 또 다른 지식을 쌓아감으로 역사를 진보시킨다. 그런 의미에서 역사는 단수이며, 단일한 것이다. 다양성을 가지고 역사는 나아가지만 진보라는 측면에서 역사의 다양성은 필연적으로 단일함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지식의 축적은 인간이 살아간 ‘자취’이며 그 자취는 다음 세대에는 진보의 땔감으로 사용된다. 기술사, 과학사, 지식사는 동일한 방법과 방향으로 나아간다. 이러한 진보들은 인간의 삶을 위한 도구들이다.

의식의 영역에 있어서도 진보는 이루어진다. 도덕적 고찰, 자아인식, 인간 조건 이해는 축적되어 모두에게 공유된다. 이러한 축적된 의식의 영역들은 한편으로 자본화되어가는 것을 목격한다. 인간들이 만들어낸 문화, 종교, 예술 등은 진보에 지분을 나누어 준다. 그러나 진보가 가지는 한계들은 진보는 개인들의 고통을 수반하는 의지와 문명의 흥망성쇠들의 구체적 드라마에서 떨어져 나가 익명의 정신과만 관계하기 때문이다. 진보는 그 특성상 한 개인의 실존의 문제를 다루기보다는 그들이 남기고간 ‘자취’에만 관심을 가진다. 그런 의미에서 개인의 죽음은 역사의 종말을 가져온다. 그러나 진보는 계속된다. 추상적이 되고, 익명성이라는 특성을 가지게 되고 더 많음은 더 나음이 되며, 그것은 결국 진보의 필연적 진행과정이다.

여기서 기독교의 출연은 진보에 대한 불가피한 충돌을 예견한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인간의 모든 것에, 전체적 태도에 그리고 전 실존에게로 향하기 때문이다. 기술적 진보는 노동자의 수고를 덜어주고 인간과의 관계를 증가시키며(?-나는 왜 리쾨르가 이 말을 했는지 모르겠다. 아마 기계의 발달로 인해 여유 증대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모든 창조에 대한 인간 지배를 시작하게 한 것이다. 기술의 진보는 궁극적으로 아담이 잃어버린 자연의 통치를 다시 되찾게 하는 도구가 될 것을 내포한다. 그러나 진보의 한계, 아니 진보를 모호하게 하는 인간의 실존적 한계를 본다. 진보는 인간 삶에 있어서 행운인 동시에 위기다. 인간들의 수고를 덜어주며 인간관계를 증폭시키며 사물에 대한 인간 지배를 증명하는 제도 장치 자체가 새로운 악의 발단이 된다. 기독교는 바로 이러한 진보 속에 숨겨진 모호성으로 향한 실존적 물음이다.

모호성

진보의 관점에서는 오직 한 인류만이 있으나 많은 문명들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자. 문명은 동일한 관점(거시적 관점에서), 동일한 기억, 동일한 목적, 동일한 가치관을 공유함으로 인해 서로를 모으며 한 공간으로 끌어 모은다. 어떤 문명은 과거에서 근대화를 거부하기도하고,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지도 않는다. 문명은 이런 의미에서 실존의 구체적 양식을 투영한다. 또한 진보와 다르게 문명은 생성되고 소멸된다. 진보가 기술적이라면, 문명은 윤리적이며, 자취의 축적, 경험의 ‘침전’과 관련하는 진보에 비해 문명의 생사는 ‘위기’와 관련된다. 토인비의 역사 연구는 이것을 폭넓게 연구하며, 입증시켜 주었다. 문명은 끊임없이 도전 당하며, 그 도전에 ‘응답’할 때에 살아남는다. 그러나 도전에 대한 응전들은 통합적으로 다룰 수 없으며, 각자의 문명 안에서 결정되어진다. 이러한 현상들은 도구의 진보에 의해 하나님 역사가 무수하게 되는 많은 방식들을 갖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문명의 위기가 정치에 의해서 생기며, 해결된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또 하나 예술과 과학이 정치 영역에서 나오는 역사적 대 사건들과 종종 일치하는 운명을 가지고 있다. 문명의 위기는 물리적 운영과 의지와 관련된다. 권력의 주변에는 오만, 증오, 공포라는 혐오스러운 귀신들이 기생하고 있다. 이것은 인간의 위대함(?)이 있는 바로 그곳에 인간의 죄가 있음을 보여준다. 이제 역사를 분석하는 길이 신학으로 가고 있음을 본다. 인간의 위대한은 죄와 함께 공생한다. 모호한 역사, 상실되고 얻어질 수 있는 역사 기회와 위기가 서로 얽힌 확정되지 않고, 모호한 역사 속에서 유죄가 일어난다. 그렇다 진보 안에서 인간은 중립적이며 낙관적이다. 그러나 오직 역사적 사건 속에서 인간은 죄인이며, 비관적이다. 신학의 등장은 바로 이러한 실존에서이다. 진보는 필연적으로 합리적이며, 통합적이어야 하며, 그러한 형태로 귀착된다. 그러나 문명의 관점에서 보여지는 역사는 모호성을 가지며, 실존적이다. 여기서 역사는 위기로 나타나면, 신학을 필요로 하게 된다.

소망

소망은 역사의 모호성에서 시작한다. 진보의 개념에서 소망은 존재하지 않는다. 진보는 궁극적으로 역사의 종말을 가져오며, 인간의 실존을 무시한다. 이것은 무의미로 역사를 끌고간다. 그러므로 진보 속에서 소망은 다룰 수 없다. 역사의 위기는 인간의 실존에 근거하며, 프로메테우스의 죄가 아니라 아담의 죄이며, 가인을 통하여 드러나 살인에서 그 실체가 드러난다. 즉 자연에 대한 죄가 아니라 형제에 대한 죄이며, 역사 없는 동물적 실존이 아니라 사랑에 대한 죄이다. 여기서 나는 앞에서 언급한 기독교는 인간의 전 실존에게로 향한다는 말을 하고 싶다. 역사의 위기 속에서 기독교는 의미를 찾는다. 모호성은 절망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소망’의 근거를 제시한다. 사건들의 흩뿌려짐을 통하여 통합이 불가능한 상태를 보면서, 무시하거나, 억지 해석이 아닌 사건 사건들 속에서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이 가능한 것은 ‘의미’ 와 ‘신비’ 때문이다. 신비는 의미가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상징은 불가피한 도구이다. 모호성 속에서 의미를 찾고 신비를 잃지 않는 이유는 모호성을 넘어서는 존재를 확신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역사의 주관자, 지배자, 주인이신 하나님이시다. 영원히 합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실존의 문제는 하나님의 계시 속에서 신비와 함께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은 이 모든 역사를 자신에게로 돌이며, 사건과 사건들을 주관하며, 의미를 부여하신다. 그렇다면, 결국 역사는 하나이며, 모든 역사는 거룩하게 된다는 소망을 던져준다. 여기서 역사의 의미는 신앙의 대상으로 보아야 한다는 과제를 안겨준다. 진보는 역사 안에서 합리적인 것을 말하고, 모호성은 비합리적인 것을 말하고, 소망은 위한 역사의 의미는 초합리적을 말한다. 기독교적 역사는 결국 종말론적이며, 세속사와 거룩한 역사의 모호한 구분 속에서도 역사는 진행하며, 마지막 날 일치된 의미는 나타날 것이다. 모든 - 다양한 역사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통합되어질 것을 소망하게 된다. 실존은 모호성 안에 머물지만, 기독교는 모호성 속에서 의미를 발견하고 소망을 갖는다. 신앙은 가장 비극적인 역사 속에서도 담대함으로 투쟁의 한 복판에서 실존을 짊어지고 투쟁한다. 소망은 모호성 안에 존재하고, 신비는 모호성 안에서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다.

Ⅱ. 본론

1. 폭력(국가적 차원에서)의 특성과 목적

- 폭력의 신성화

폭력의 기원과 속성은 신적이다.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스스로 신화(神化)하는 것을 말한다. 즉 자신이 판단하고 단죄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판단과 단죄는 오직 신적인 것이며, 신이라야 그 권위가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폭력은 신성한 것이며, 거룩한 것이다. 구약의 이스라엘은 신을 대신하여 악을 제거하는 성전(聖戰)을 치렀다. 그 대표적 인물이 여호수아이다. 모슬림의 전쟁도 알라의 뜻을 행하는 성전이며, 중세의 십자군도 그 뒤를 잇는다. 인류 역사의 모든 전쟁은 이러한 신적 기원을 가지고 있다. 심지어는 임진왜란도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천황은 신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로마의 황제는 살아있는 신이다. 고대의 전쟁은 ‘신들의 전쟁’으로 불리우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들 때문이다.

- 폭력의 사유화

폭력은 타자에 대한 종말을 고하는 것으로 신의 영역 안에 들어가 있다. 가인의 살인은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신을 대신하는 최초의 혁명이요, 신에 대한 반역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신의 복수를 기대하지 않고 자신이 스스로 신이 되어 복수를 감행하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 폭력이 개인적이고 사적인 것이 된다면 사회는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노아 시대의 사회가 그랬다. 사회는 여기서 필연적으로 협약이 필요하게 되며, 자신의 폭력의 권력을 정부에 위탁 또는 위임하게 된다. 이제 복수는 자신의 것이 아니라 정부의 손에서 해결된다. 이제 정부는 개인에게서 위임을 통해서 권위를 가지게 되고 개인을 대신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국가를 최고의, 최후의 폭력 행사자가 된다. 국가는 신성하게 되고, 거룩하게 된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서 출발한다. 폭력의 최종 결정자이며, 시행자인 국가는 권력을 통하여 사회 정의를 실현하기보다 개인에게 권력을 넘겨주게 된다. 즉 모든 권력은 왕이라는 한 사람에게 집중하게 되고 국가의 권력은 개인의 권력이 되는 셈이다. 위임된 권력은 오로지 한 사람을 위해서만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정치권력에의 유혹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한 개인의 차원에서 국가적인 차원에서 권력의 거룩함을 한 개인이 소유하게 됨으로 궁극적으로 다시금 폭력은 한 개인에 의하여 이루어지고, 한 개인만을 위한 도구가 되는 것이다. 파시즘과 전제주의야 말로 이러한 사실을 실제화 한 것이다. 히틀러가 살아있는 신으로 불려진 것은 이상할 것이 전혀 없다. 이것이야 말로 가장 추악한 권력의 쓰레기이다. 공직자의 타락이 추악한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이유 때문에 권력에의 유혹이 강렬하게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예수님의 죽음 이러한 가장 추악한 정치권력 집단에 의하여 저질러진 동물적인 살인행위이다. 빌라도의 정죄는 자의로 이루어진 것은 아닐지라도 자신의 유익과 이익을 위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자신의 권력을 십분 활용하여 그리스도를 죽인 것이다. 그리스도를 죽임으로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고 자신의 입지를 세우려 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의 경우도 빌라도와 정확히 일치한다. 그들은 예수를 통하여 일어날 수 있는 많은 해악들을 점검해 보고 결국 그가 죽어야 자신들의 이익에 해가 되지 않으며, 민심이 수습될 것이기 때문이다. 아벨의 죽음 안에도 이러한 폭력의 신성함과 추악함이 스며들어있다. 가인의 살인은 자신을 정당화하고 변증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아벨의 제사를 통하여 가인은 거짓된 경배자로 탈로가 났기 때문이다. 정치권력은 이러한 개인적인 폭력을 공적으로 바꿈으로 인해 더욱 강력한 근거를 확보하고, 폭력을 정당화한다. 결국 국가적 폭력은 개인의 종말을 고하는 동시에 새로운 집단화된 개인의 폭력을 정당화한다.

-정의 : 폭력의 대의명분

정치 권력은 사회 안정과 국민의 보호라는 대의명분을 가지고 있다. 권력이 사용되는 곳은 이 대의명분이 생겼을 때이다. 국가와 사회를 위협하는 존재 - 그가 개인이든 타국이든지 간에 - 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정의’는 바로 이곳에서 일어나는 명분을 보호하는 갑옷이 된다. 정의 실현이 바로 국가 권력이 갖는 대의명분인 것이다. 명분 없는 전쟁을 본적이 있는가? 일본의 조선침략도 조선을 외세로부터 보호하려는 명분을 가지고 있으며, 미국의 이라크 침략도 세균탄으로 인한 인류의 안전과 인권을 보장하기 위한 명분을 가지고 있다. 정의의 실현이 폭력의 가장 긍극적인 목적이다.

- 국가 폭력의 방향성

마르크스는 사회 구조를 두 계급간의 투쟁으로 보았다. 두 사이는 물과 기름과 같은 사이로 공존할 수도 없고, 해서도 긴장의 관계이다. 부르조아는 프롤레타리아를 착취하고, 프롤레타리아는 일방적으로 억압받는 존재이다. 여기서 공존은 불가능한다. 왜냐하면 부르조아는 자신들의 이익을 조금도 양보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회는 불가피하게 혁명을 요구하게 되고, 피를 부르는 투쟁을 치를 수밖에 없게 된다. 폭력의 정당성은 이렇게 설정된다. 여기서 두르러지게 나타나는 것은 폭력의 무관용이다. 폭력이 행하는 근저는 불복종과 비타협이 자리를 잡고 있다. 폭력은 관용을 용납하지 못한다. 폭력은 타인의 죽음, 즉 종말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폭력이 향하는 곳은 타인의 죽음이다.

폭력 행사의 중요한 이유는 일치로의 갈망이다. 초대교회 당시 로마의 황제들이 기독교인들을 잔인하게 살인하고, 무자비하게 핍박한 것은 로마의 평화를 위한 ‘일치’를 위해서였다. 분명 그리스도인들은 제국의 입장에서 볼 때 위협적인 존재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다른 주를 섬기기 때문이다. 황제를 주로 고백하는 것은 단순히 신으로 숭배하기 위한 것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황제를 중심으로 한 나라, 한 정신, 한 공동체를 결성한다는 숭고한 뜻이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것을 거부했다. 국가의 시각으로 그들은 국가의 기강을 무너뜨리는 해악한 존재들이며, 나라를 썩게 하는 누룩들이었다. 한 나라는 인격을 소유해서는 안 된다. 모든 것은 통제되어야 하며, 관리될 수 있어야 한다. 예외는 불안과 긴장만을 조장할 뿐이다. 국가 폭력은 여기서 그 정당성을 부여받는다. 국가를 위협하는 존재들에 대하여 국가 권력은 발효되며, 폭력은 그 힘을 사용하게 된다. 폭력이 가져오는 필연적인 개인의 종말이다. 여기서 국가 권력은 비인격을 위해 인격을 멸하는 것으로 등장한다. 관리하기 불편하고, 어려운 것들은 잘려져 나가야 한다. 국가는 합리적이고, 통합적인 무인격이어야 한다. 조금의 예외도, 특별한도 용납될 수 없다. 오직 보편만이 유일한 국가의 생존 방식이어야 한다.
일치로의 갈망은 종교적으로도 뿌리 깊게 내려져 있다. 율법은 이스라엘을 하나의 삶의 방식을 강요한다. 그것에서 벗어나는 것은 죽음으로 직결된다. 폭력은 여지없이 범법자들을 향하여 나아간다. 여기서도 무관용은 적절하게 자리를 잡는다. 율법의 목적은 죄를 깨닫게 하여 온 인류를 죄인으로 만들어 죄인들을 죽이는 사명을 갖는다. 율법은 필연적으로 죽음을 부르는 피를 요구한다. 피 없는 제사는 없다. 정의는 이렇게 실현되는 것이다.

2. 역사의 모호성에서 소망으로

-정의의 실현 그러나 또 다른 악의 출현의로서의 국가 폭력

사도 바울은 국가의 권위에 순종해야할 이유를 국가가 정의를 실현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국가가 실현하는 정의는 사회악에 대한 징벌을 의미한다. 여기서 정의는 사회의 생존에 직결된다. 정의를 실현하기 위하여 국가는 권력을 행사하는데 그것은 폭력이다. 폭력은 국가 권력의 물리적 나타남이다. 모호성은 바로 여기서 시작한다. 정의를 실현해야할 국가권력이 한 개인의 소유물로 떨어짐으로 인하여 정의를 실현하는 도구가 아니라, 정의를 탄압하는 자로 서게 된다. 악은 부조리이며, 비합리이다. 정치권력은 욕망의 도구로 전락한다. 권력은 인간으로 하여금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힘을 가진다. 자기 안에 내재된 욕망을 실현하는 가장 탁월한 수단이다. 역사는 위기를 맞게 된다. 진보하는 역사는 역행하지는 않지만 인류 문명은 위기에 처한다. 신성한 국가 권력이 포악한 짐승으로 변질되는 순간이다. 역사는 여기서 진보가 아닌 위기로 읽혀져야 한다. 인간의 위대성은 신성한 절대 권력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루이 14세의 ‘짐이 곧 국가다’라는 말이 이 사실을 증명한다. 인간의 위대성이 있는 곳에 인간의 죄가 있다.

-건축물 : 인간의 위대성과 악함의 두 얼굴

인간의 위대성은 거대한 건축물들에 의해서 증명된다. 그 건축물들은 약자들의 피와 눈물로 지어졌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라암셋을 건축했다는 것은 절대 권력 아래에서의 고통이 얼마나 컸던가를 암시한다. 위대한 문명은 항상 위대한 건축물로 증명된다. 바벨론의 거대한 신전, 이집트의 피라밋, 진시황의 만리장성 등은 폭력 아래서 착취당한 약자들의 생명과 맞바꾸어진 것들이다. 창세기 11장의 바벨탑 사건은 권력의 극대화로 인한 압정과 착취의 실존적 유비이다. 타락한 인간의 아들인 가인이 하나님의 낯을 피해 놋 땅에 가서 한 일을 도시를 건설하는 일이었다. 도시 건설은 인간이 인간이기를 갈망이며, 시민으로의 자기 정체성을 찾는 작업이다. 타락한 아담의 후손들의 도시 건설은 필수는 아니지만 필연적이다. 위대한 문명은 항상 도시 문명이었다는 것을 기억하자. 도전에 대한 응전은 합리적이고 거대한 건축물, 그리고 체계적으로 정리된 도시 문명이다. 하나님께서 회복할 인간의 거주처는 새예루살렘성(城)이다.

-역사에 대한 물음 그리고 의미

실존주의는 역사의 모호성 앞에서 존재의 의미를 묻는다. 하지만 결코 답을 얻지 못한다. 실존주의의 귀결은 시지프스의 신화 속에서 끊임없이 절망하는 역사의 종말이다. 마르크스는 역사의 모호성을 철저히 무시하고 혁명을 통하여 새로운 사회를 창조하려 했다. 수단은 피의 혁명이다. 타자의 죽음으로 역사의 종말을 이루려 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혁명을 완수 했을 때 또 다른 혁명의 대상으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흩어진 사건의 파편들 속에서 기독교는 의미를 찾는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역사를 산발적이고, 우연들의 돌연한 출연으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존재를 통하여 우주는 합리적으로 통치되고 있기 때문이다. 실존주의는 모호성 안에서 갇혀 탈출을 시도하지만 나올 수가 없다.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이며, 통합을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역사의 모호성에서 소망을 발아(發芽)한다. 인간의 고통과 부조리 속에서 신앙은 더욱 고무되어진다. 바로 이곳이 기독교와 실존주의가 결별하는 곳이다. 역사의 모호성은 기독교인들에게 광기어린 미치광이의 살풀이가 아니라,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장엄한 교향곡이다. 기독교의 주요한 사건들은 이것을 뒷받침 한다. 탄생-고난과 죽음- 부활, 구속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모호성을 모호성으로 내버려두지 않고, 멋진 조각품으로 만들어 놓는다.

Ⅲ. 결론

기독교인의 역사 참여

기독교인의 역사 참여는 어떻게 가능한가? 그러기에 앞서서 역사 참여가 무엇인가를 질문해야 할 것이다. 기독교인이 가지는 역사관은 직선적이라고 할 수 있다. 직선적이라 함은 시작과 끝이 명확히 구분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이유를 목적을 가지고 역사를 나아간다. 이러한 기독교적 역사관은 오스카 쿨만이 지적한 대로 ‘이미’ 그러나 ‘아직’이라는 문구 속에 정확하게 담겨진다. 어떤 학자는 기독교인의 역사와 시간은 영원 속에 계란처럼 타원형처럼 생겼다고 풍자적으로 말했다. 시작도 영원이고 끝도 영원이고 역사도 단지 시간으로만 존재하지 않고 영원이 침투해 들어오기 때문으로 해석한다. 기적은 바로 여기, 역사 속으로 들어온 영원이 사건과 충돌할 때 일어난다. 무척이나 칼 바르트적이다. 내가 보기엔 기독교 역사는 영원이라는 우물 속에 빠진 시간이라는 스펀지 같다. 기적은 시간 속에서 갑자기 발생된 모순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일어난 영원(永遠)사건들이며, 사건들과 구분은 가능할지 몰라도 분리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세속사는 구원사와 별개의 것이지만, 구원사 속에 들어가 있다. 여기서 역사의 부조리와 비합리성 속에서 총체적으로 통합할 수 있는 근거를 가지게 된다. 기독교인의 역사 참여는 바로 이 근거를 가지고 시작한다. 모든 것이 기독교 안에서 통합되고 일치된다는 소망, 즉 궁극적으로 일어날 종말이 그것이다. 그렇다면 기독교인의 역사 참여는 무척이나 진보적이며, 확정적이다. 또한 역행하지도 않게 될 것이다.

역사 참여의 방법

누가복음 10장에 나타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기독교인의 역사 참여 방법에 대하여 놀라운 통찰력과 모범을 보여준다. 예루살렘성에서 나와 여리고성으로 내려가는 어떤 한 사람과 강도들과의 우연한 만남이 그 시작이다. 강도들은 사회의 악이며, 무질서이며, 위기이다. 결과는 비참하다. 옷은 벗겨지고, 온 몸은 강도들에 의하여 심한 상처를 입고, 길가에 버려진다. 예수님은 여기서 사회적, 정치적 분석을 하지 않고, 우연성과 개연성만으로 사건을 풀어 나간다. 다음으로 세 사람과의 만남이 이루어진다. 첫 사람은 제사장이다. 제사장과의 만남은 제사장의 의도적인 피함으로 인해 실패한다. 다음은 레위인이다. 레위인 역시 제사장과 동일하게 의도적으로 그 사람을 피하여 간다. 두 만남은 무의미하게 끝이 난다.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사마리아인은 그를 보고 긍휼히 여기고, 상처를 싸매주고 여관으로 그를 데리고 가서 돌보아 준다. 사마리아인과의 만남은 성공적이었다. 예수님은 이웃이 누구냐라는 질문을 한 율법사를 향하여 되묻는다. 누가 강도만난 자의 이웃이냐? 여기서 예수님의 질문은 율법사의 변명을 인간의 실존의 문제로 대응하신다. 강도만나 자에게 필요한 존재가 누구인가? 그는 자비를 실천한 사람이다. 너도 그렇게 자비를 실천하라. 리쾨르의 분석은 탁월하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사회적 기능은 가진 존재로, 자기 역할에 사로잡힌 인간으로 돌발적인 만남에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할 정도로 사회적으로 바쁜 인간들이다. 그들은 제도 속에 묶여 있어서 제도 외의 돌발적인 사건에 무용지물이다. 그에 비해 사마리아인은 여행 중에 있는 사람으로 제도에 묶이지 않는 존재이며, 사회적 책임으로부터 자유한 존재이다. 그는 언제든지 방향을 바꿀 수 있으며, 예기지 못한 사건에 직면할 준비가 되어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제도 속에서 형식으로 사람을 대면하지만, 사마리안 인은 ‘인격과 인격’으로 대면한다. 진정한 휴머니즘의 실천자이다. 율법의 정신은 기능(제사)을 감당하는 것이 아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웃을 향하여 자비를 베푸는 자, 이웃을 긍휼히 여기는 자, 바로 그가 율법을 실천하는 자이며, 율법을 완성하는 자이다. 진정한 신본주의자는 완전한 휴머니스트이다. 기독교인의 역사 참여는 바로 여기, 이웃에 대한 개념을 파괴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공통의 정신, 가치관의 공유, 동일한 집단, 나에게 이익을 가져다 주는 어떤 존재 또는 무리가 이웃이 아니다. 나의 이웃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웃은 오직 되어주는 것이다. 역사의 모호성 안으로 직접 뛰어 들어가 악과 부조리 속에서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허비하고, 치유하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기독교인의 역사 참여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는 먼저 휴머니스트가 되어야 한다. 그는 먼저 기능적인 존재가 아니라 인격을 가진 존재로 살아가야한다. 이러한 구체적인 예들은 예수님의 양과 염소의 비유를 통해 선명해진다. 종말의 때에 하나님께서 물으시는 것은 사람이 어떤 만남을 갖고 살아갔는가를 묻는 것이다. 염소와 양의 구분은 그들의 도덕성이나, 사회적 기능에 대한 책임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작은 자’들에 대한 만남이다. 그 작은 자들을 예수님은 ‘나’라고 직접적으로 말씀하신다. 양의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놀라 이렇게 묻는다. ‘주님, 우리가 언제 당신의 주린 것과 목마른 것을 보았습니까?’ 별로 중요하지 않는 자들에 대한 사랑이 곧 주님에 대한 사랑이다. 여기서 우리는 놀라운 역설(逆說)을 발견한다. 양으로 분류된 사람들의 놀람은 자신들의 기대에 대한 경악스러운 반전이 있기 때문이다. 주님은 여기서 갇힌 자, 벗은 자, 목마른 자들을 ‘나’라고 말씀하신다. 양들 편에 선 사람들의 놀람은 바로 그 사실이다. 자신들이 돌보아 준 사람들은 ‘주님’으로 알고 대한 사람이 아니다. 그들은 아주 하찬은 존재들이며, 무가치한 존재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을 돌아 본 것이다. 그들을 불쌍히 여겼고, 그들을 돌아보아 준 것 뿐이다. 그것은 주님을 위해 한 것도, 주님 때문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은 주님께 한 것이었다. 이것이 그들의 놀람이었다. 주님은 이 땅에서 헐벗었고, 옥에 갇혀있고, 목마르며, 배고프다. 지금도 말이다. 주님은 역사의 모호성을 무시하거나, 타락한 인류의 폐기물로 취급하지 않으시고, 자신이 직접 그 모호성 안에서 살아가고 실존하신 것이다.

악에 대항하는 비폭력은 이웃을 사랑하는 계명을 따르는 것이다. 폭력은 존재에 대한 거부이며, 비폭력은 존재에 대한 사랑 때문에서 출발해야 한다.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는 말씀과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과 정확히 일치한다. 기독교인이 비폭력으로 역사에 참여해야하는 것은 바로 이 이유 때문이다. 역사의 모호성은 모든 것을 거부하거나, 변혁하는 욕망으로 유혹될 수 있다. 그러나 기독교인은 그것들을 거부하지 않는다. 그대로 끌어 않은 채 함께 고통하며 인간의 실존 안에 머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십자가는 정확히 인간의 실존을 간직한 채 정치권력의 악을 드러내 준다. 잘못된 권력에 대한 거부는 그 권력에 대하여 자유함을 보여준다. 또한 그 폭력에 대하여 폭력으로 대항하지 않는 이유는 이웃을 사랑을 통한 역사 참여를 이루는 길이기 때문이다. 비폭력으로 대항하지 않으므로 그들을 사랑한다는 것은 입증하며, 권위에 대한 불복종은 잘못된 권위에 대한 도전이며 항거이다. 원수를 사랑하는 말씀은 궁극적으로 율법이 지향하는 이웃을 사랑하는 말씀의 구체적인 지침이다. 선한 사마리안 인의 비유를 통해서 가르쳐진 이웃은 더 이상은 누가 이웃인가의 문제가 아니다. 이웃이 되라는 사랑의 실천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폭력을 통한 권력의 불순종은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의 실천인 것이다.

이러한 실천은 역사의 진보, 즉 기독교 종말론적 관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창조세계에로의 역사 참여인 것이다. 여기서 역사의 진보는 더 이상 복음과 단절되지 않고, 통합을 이루는 것이다. 복음을 가지고 창조 세계에서 살아가는 방식은 모호성으로 인하여 버려진 작은 자들을 돌아보는 사랑의 실천이다. 이것은 예수님은 온전한 인간으로서 성취하셨고, 우리들에게 모범을 보여 주셨다. 그 범위는 이웃라는 질문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가서 이웃이 되어 실천하는 삶으로 되어진다. 복음의 삶은 후에 이루어질 인간성을 따라 살아가는 삶이며, 이것이야말로 가장 올바른 역사의 진보를 향한 역사 참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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