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마5:5
복 ; 마카리오스 70인역에 의하면 이 복은 히브리어 아쉬레의 번역어 이 단어는 외적인 번영 즉 정치 경제 물질 등의 번영을 뜻하는 단어이다.
천국 (바실레이아.. 나라가 아닌 왕국 즉 왕이 다스리는 나라이다.) 이 지금 있다. 에스틴-현재시제이다.
오늘 이 말씀에는 놀라운 역설이 담겨있습니다. 가난한한자, 즉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을 향하여 예수님을 복이 있다고 선언하십니다. 가난은 궁극적으로 죄의 결과로 일어나는 궁핍의 현상으로 하나님의 저주로 인식된다. 예수님은 구약의 하나님의 저주로 인식되는 가난한 자를 향하여 복을 선어하고 있는 것이다. 복은 부자들에게 주어지는 구약의 선언이다.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 것이며, 비상식적이다. 외형적인 번영의 복이 가난한 자에게 있다는 것은 말이 안되는 것이다. 그런 비논리를 사용하여 주님은 저주를 축복으로 전복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 선언은 청중들로 하여금 충격을 받게하고 놀라게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즉시 이 질문을 할 것입니다.
“왜?” “어떻게 가난한 자가 부자이며, 저주받은 자가 복이있단 말인가?”
주님은 그 답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지금 그들에게 천국이 있기 때문이다” 즉 그들이 지금 천국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가장 부자이고, 복이 있는 자들이다라는 것이다.
이 말씀도 쉽게 수용하기 힘든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에게 천국은 먼미래의 일이며, 정치적인 독립을 쟁취하여 온전한 나라를 이루는 것은 천국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식민지의 상태이고, 또한 육신의 몸을 입고 있는데 어떻게 천국이 지금 있단 말인가라고 의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물었습니다.
“주님 언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겠습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여기있다. 저기있다 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지금(에스틴-현재분사로 지금있다는 뜻이다) 있기 때문이다” (눅17:20-21)
주님의 이 선포는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선포보다 더욱 듣는 이들을 놀라게 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눈에 보이는 나라로, 또는 죽어서 내세에서 이루어지는 나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지금 천국이 임했다고 선언하십니다. 사실 이 주장은 정통교리를 신봉하는 유대인들에게는 이단적인 발언입니다. 그것 모독이며, 멸시이며, 신성모독죄입니다. 그것은 두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1) 첫번째는 하나님의 나라가 가난한 자 즉 보잘 것 없고, 무가치하며, 아무힘이 없는 버림받은 이들, 거지같은 이들에게 소유된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그런 보잘것 없는 사람들이 취하는 나라가 아닙니다. 자신들과 같이 의롭고 경건하고 지적인 사람들이 들어가는 곳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서 창기나 세리들이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는 말에 몹시 모멸감을 느꼈습니다. “아니 어떻게 세리나 창기들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다는 말인가? 오! 그런일은 결코 없을 것이며, 그러지도 말아야 한다”
보십시오. 그들이 억압하고 무시하고 인간같지 않는 존재들이고 멸시한 바로 그 사람들이 천국을 지금 소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복음입니다.
천국은 욕심과 욕망으로 들어 갈 수 없습니다. 자신을 의지하고 의롭다고 믿는 사람들은 들어가지 못합니다. 주님은 친히 인간으로서 당할수 없는 수치스러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런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와 함께 죄인이 되는 것이며, 함께 멸시와 천대를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방식으로 죄인들을 구원하시기를 원했습니다.
천국은 죄인들이 가는 곳입니다. 의인들은 들어가지 못합니다.
나를 의지하고 나의 공로와 지혜를 의지하는 자는 들어가지 못합니다.
오로지 예수님의 수치스러운 십자가만을 붙드는 자만이 천국을 소유할 것입니다. 아니 지금 천국이 그들에게 있습니다.
복 ; 마카리오스 70인역에 의하면 이 복은 히브리어 아쉬레의 번역어 이 단어는 외적인 번영 즉 정치 경제 물질 등의 번영을 뜻하는 단어이다.
천국 (바실레이아.. 나라가 아닌 왕국 즉 왕이 다스리는 나라이다.) 이 지금 있다. 에스틴-현재시제이다.
오늘 이 말씀에는 놀라운 역설이 담겨있습니다. 가난한한자, 즉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을 향하여 예수님을 복이 있다고 선언하십니다. 가난은 궁극적으로 죄의 결과로 일어나는 궁핍의 현상으로 하나님의 저주로 인식된다. 예수님은 구약의 하나님의 저주로 인식되는 가난한 자를 향하여 복을 선어하고 있는 것이다. 복은 부자들에게 주어지는 구약의 선언이다.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 것이며, 비상식적이다. 외형적인 번영의 복이 가난한 자에게 있다는 것은 말이 안되는 것이다. 그런 비논리를 사용하여 주님은 저주를 축복으로 전복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 선언은 청중들로 하여금 충격을 받게하고 놀라게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즉시 이 질문을 할 것입니다.
“왜?” “어떻게 가난한 자가 부자이며, 저주받은 자가 복이있단 말인가?”
주님은 그 답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지금 그들에게 천국이 있기 때문이다” 즉 그들이 지금 천국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가장 부자이고, 복이 있는 자들이다라는 것이다.
이 말씀도 쉽게 수용하기 힘든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에게 천국은 먼미래의 일이며, 정치적인 독립을 쟁취하여 온전한 나라를 이루는 것은 천국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식민지의 상태이고, 또한 육신의 몸을 입고 있는데 어떻게 천국이 지금 있단 말인가라고 의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물었습니다.
“주님 언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겠습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여기있다. 저기있다 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지금(에스틴-현재분사로 지금있다는 뜻이다) 있기 때문이다” (눅17:20-21)
주님의 이 선포는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선포보다 더욱 듣는 이들을 놀라게 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눈에 보이는 나라로, 또는 죽어서 내세에서 이루어지는 나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지금 천국이 임했다고 선언하십니다. 사실 이 주장은 정통교리를 신봉하는 유대인들에게는 이단적인 발언입니다. 그것 모독이며, 멸시이며, 신성모독죄입니다. 그것은 두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1) 첫번째는 하나님의 나라가 가난한 자 즉 보잘 것 없고, 무가치하며, 아무힘이 없는 버림받은 이들, 거지같은 이들에게 소유된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그런 보잘것 없는 사람들이 취하는 나라가 아닙니다. 자신들과 같이 의롭고 경건하고 지적인 사람들이 들어가는 곳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서 창기나 세리들이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는 말에 몹시 모멸감을 느꼈습니다. “아니 어떻게 세리나 창기들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다는 말인가? 오! 그런일은 결코 없을 것이며, 그러지도 말아야 한다”
보십시오. 그들이 억압하고 무시하고 인간같지 않는 존재들이고 멸시한 바로 그 사람들이 천국을 지금 소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복음입니다.
천국은 욕심과 욕망으로 들어 갈 수 없습니다. 자신을 의지하고 의롭다고 믿는 사람들은 들어가지 못합니다. 주님은 친히 인간으로서 당할수 없는 수치스러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런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와 함께 죄인이 되는 것이며, 함께 멸시와 천대를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방식으로 죄인들을 구원하시기를 원했습니다.
천국은 죄인들이 가는 곳입니다. 의인들은 들어가지 못합니다.
나를 의지하고 나의 공로와 지혜를 의지하는 자는 들어가지 못합니다.
오로지 예수님의 수치스러운 십자가만을 붙드는 자만이 천국을 소유할 것입니다. 아니 지금 천국이 그들에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