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인 최초의 기독교 신자 가운데 한 사람인 백홍준(白鴻俊)은 1848년에 평북 의주(義州)에서 태어났으며 호는 북산(北山)이다. 상인이었던 그의 아버지가 1874년 10월경 만주의 통화현(通化縣) 고려문(高麗門)을 방문하였다가 영국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선교사인 로스(Ross, J.·羅約翰)목사를 만나 한국 정세와 발음법을 가르쳐주고 한문으로 된 신약성경과 '훈아진언'(訓兒眞言)이라는 소책자를 받아온 일이 있었다.
아버지가 가져 온 책자를 몇몇 친구들과 함께 2∼3년간 공부한 다음 북산은 1879년 순전히 '교리를 배울' 목적으로 로스목사를 찾아 만주 우장(牛莊)으로 갔는데, 그때는 로스목사가 안식년 휴가를 맞아 조국인 영국으로 귀국하고 없었다. 대신 같은 선교회 소속인 매킨타이어(MaIntyre, J.·馬勤泰) 목사가 그를 맞이하였고, 그곳에서 북산은 구도자로서 3,4개월을 지냈다. 마침내 그는 신앙을 고백하고 친구인 이응찬(李應贊), 이성하(李成夏), 김진기(金鎭基) 등과 함께 세례를 받고 기독교 장로교회의 신자가 되었다. 이 네 사람은 한날 한시 한꺼번에 세례를 받은 것이 아니라 시차를 두고 받았으며, 이름이 전하지 않는 첫 세례인이 배출된 직후에 북산이 두 번째로 세례 받았다고 전해진다.
그 후 그는 친구들과 함께 다시 만주로 돌아 온 로스목사가 주도하는 중국의 한문성경을 우리말로 번역하는 작업에 서너달동안 착수하였다. 이처럼 여러 명의 한국인들이 힘을 모아 나라 밖에서 한글로 성서를 번역했다는 일 자체가 바로 한국기독교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이즈음 1880년 의주에 있던 10여명의 구도자들의 요청에 따라 매킨타이어 목사가 북산을 시켜 성경과 소책자 한 상자를 보낸 일이 있었다. 그랬는데 그가 머무르던 국경지역의 여관에서 짐보따리를 수상히 여긴 주인의 신고로 관헌에 의해 압수되고 동봉한 편지가 발각되어 약 3개월간 투옥된다. 당시 나라에서 금하던 천주교신자가 아닌 까닭에 풀려 나오기는 했지만 이로인해 북산은 거의 모든 재산을 잃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시 만주의 영구(營口)로 매킨타이어 목사를 찾아가 "자신을 위해 돌아가신 주님을 위해 핍박받는 것이 즐겁다"고 고백하였다.
이러한 북산의 열렬한 신앙은 이듬해인 1881년 100여명의 한국인들이 매킨타이어 목사를 찾아와 그가 개설한 성경공부반에 참석해 일주일간 공부하고 돌아가는 일로 발전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상당량의 한문으로 된 성경이 국내에 밀반입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로스목사가 몇몇 한국인의 도움을 받아 오랫동안 추진한 한글성서 번역사업이 결실을 맺어 1882년 최초의 한글성서인 '예수셩교 누가복음젼셔'와 '예수셩교 요한복음젼셔'가 심양(瀋陽)의 문광서원에서 간행되었다.
당시 한글성서 번역을 도운 핵심 구성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북산은 이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을 가지고 만주 서간도(西間島)의 한인촌에 전도하여 75명의 신자를 만들기도 했다.
이처럼 마을마다 성경을 짊어지고 찾아가 팔거나 읽기를 권하면서 기독교신앙을 전파한다는 의미에서 이러한 사람을 권서인(勸書人) 또는 매서인(賣書人)이라고 불렀는데 다른 나라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용어이다. 이러한 일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일단 자국어로 번역된 성서가 있어야 가능하다. 따라서 '성서중심적'이고 '자발적 복음 수용'이라는 한국기독교의 특색을 나타내는 용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북산과 같은 개척적인 전도인의 활약으로 외국인 선교사가 들어오기 전에 이미 만주지역과 한반도 북부지역 몇 곳에 기독교 신앙공동체가 설립될 수 있었다. 당시 그가 뿌린 복음의 씨는 계속적으로 열매를 맺어 훗날 평안도 일대가 상당기간 동안 한국기독교의 중심지가 되는 초석을 놓은 것이다.
그리고 1883년 북산은 로스목사에게 전도인으로 인정받았고 국내전도를 위해 성서를 가지고 잠입하여 의주, 삭주, 강계, 구성 등지에서 전도한 끝에 10여명의 신자를 얻었다.그는 주일마다 자기 집에서 이들과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림으로써 비록 조직된 교회의 형태는 아니었다 하더라도 국내 최초의 개신교 신앙공동체를 만들었던 것이다. 이때 북산은 의주에서 요리문답반을 운영하고 있었으며, 적어도 1885년에는 18명의 신자가 모인 예배처소가 마련될 정도가 되었다.
북산이 전도활동에 힘쓰고 있을 때인 1883년과 1884년에는 '사도행전' '마가복음' '마태복음'이 한글로 간행되었으며, 1885년에는 '로마서' '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가 간행되었다. 이어 1887년에는 '예수셩교젼셔'라는 이름으로 신약성서 전체가 한글로 번역되어 5,000부가 출간되었는데, 흔히 '로스번역본'(Ross Version)이라고 불린다.
따라서 북산은 1년 미만의 기간 동안만 성서의 한글번역작업에 참여한 것으로 보이므로 번역가라기보다는 전도인으로 평가될 수 있다. 그후 북산은 1885년 4월 5일 미국 북장로교 소속 선교사 언더우드(Underwood, H.G.·元杜尤) 목사가 서울에 들어왔다는 소식을 접하고 몇개월 후에 서울로 가서 그가 개최한 신학반에서 공부하였다.
한편 그해 말 북산은 서상륜(徐相崙), 최명오(崔明悟)와 함께 스코틀랜드 연합장로교회의 월급을 받는 한국교회 최초의 유급 교역자로서 조사(助師·지금의 전도사에 해당함)에 정식 임명되어, 평북일대의 교회를 개척하는 중임을 맡았다. 훗날 1891년부터는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에서 매년 봉급을 받았으며 죽을 때까지 왕성하게 기독교 교리를 전파하는 일에 앞장섰다.
그리고 북산은 1887년 9월 27일 서울에 있던 언더우드 목사가 자기 집 사랑방에 14명의 세례교인을 모아놓고 한국 최초의 조직교회인 정동교회(현재의 새문안교회)를 창립할 때에도 참가했다. 그리고 그는 서울에 상경할 때마다 언더우드 목사에게 의주로 직접 와서 그곳 신자들에게 세례를 베풀어 달라고 간청하였다. 마침내 북산의 청을 받아들인 언더우드 목사는 드디어 1889년 의주까지의 신혼여행을 구실로 여행 허락을 정부측으로부터 받아냈다. 언더우드 목사는 의주에 도착하여 세례 지원자 100여명 가운데 세례문답을 통해 33명을 선발하여 세례를 베풀기로 작정했으나, 당시 국법상 공개리에 자국 영토내에서 기독교식 의례를 베푸는 일이 어려워 배 한 척을 빌려 타고 압록강의 중국 편 연안으로 건너가서 세례를 베풀었다.
이들 대부분이 북산에 의해 전도받은 사람들이며, 이중에는 그의 딸과 사위 김관근(金灌根), 김관근의 부친 김이련(金利鍊) 등이 포함되었다. 이 때가 4월 27일이었으며 이를 '한국의 요단강 세례'라고도 부른다.
그러나 얼마지나지 않아 이 일이 정부에 알려졌으며, 곧 이어 선교사들의 여행금지령이 내려지고 서울에 있던 정동교회 예배도 일시 폐쇄되었다. 이 무렵 북산이 여러 서양인들과 자주 내왕하는 것을 보면서 당시 관가에서는 그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과 적개심을 품었다. 결국 당시 평안감사 민병석(閔炳奭)의 지시로 의주에서의 기독교인 수색작업이 진행되었고, 북산은 서양인과 내통한 죄로 의주에서 체포되어 옥에 갇혀 갖은 고문을 다 겪으며 상당기간 동안 투옥되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혹독한 고난에도 불구하고 북산은 풀려나자마자 계속해서 중국의 심양까지 여러차례 왕래하면서 로스목사와 자주 연락을 취했다. 이러한 북산의 정성에 감동하여 1890년에는 로스목사가 의주에 와서 그의 집에 한 달이상 머무르면서 신도들의 신앙을 지도하고 예배를 인도하기도 했다.
이듬해에는 마펫(Moffett,S.A.·馬布三悅), 게일(Gale, J.S.·奇一) 두 선교사가 전국 순회여행을 하면서 의주에 들렀던 일이 있었다. 이 때도 북산은 두 선교사를 몸소 안내하면서 의주와 강계 일대에서 전도활동에 전념했다.
이와같이 열성적 전도인이었던 북산은 입국한 선교사들의 서북지역 전도여행을 길잡이하고, 스스로도 여러 지역에서 기독교 교리를 전할 동역자들을 길러내는 등 매우 정력적인 전도활동을 벌였다. 한국 최초의 기독교 전도사로 평가되는 북산은 당시 선교사들이 남긴 편지내용을 살펴볼 때 1893년 12월이나 1894년 1월경 세상을 떠났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 선교사들은 온갖 환난을 당해도 흔들리지 않고 능동적인 신앙인과 전도인의 삶에 충실한 북산을 '백사도'(白使徒)라고 부를 정도였다. 한마디로 북산은 '사도 바울'에 비견할 만한 한국 기독교 개척기의 기초를 다졌던 중요한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