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을 믿어도 왜 계속 죄를 짓습니까?
예수님을 믿어도 왜 계속 죄를 짓습니까?
예수님을 믿으면 새로운 사람이 된다고 말합니다. 죄 사함을 받고 성령께서 거하시며, 이전 것은 지나가고 새것이 되었다고 성경은 선언합니다(고후 5:17). 그런데 현실의 신자는 여전히 화를 내고, 욕심을 부리며, 거짓말하고, 미워하고, 때로는 같은 죄를 반복합니다.
그렇다면 믿음이 부족한 것입니까. 거듭남이 거짓이었던 것입니까. 예수님을 믿는다는 고백이 아무런 능력도 없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신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으로 새롭게 되었다고 말하면서도,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 죄와의 싸움이 계속된다고 가르칩니다. 예수님을 믿는 순간 죄의 형벌에서는 해방되지만, 죄의 존재가 즉시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은 단번에 시작되지만, 변화는 평생에 걸쳐 이루어집니다.
칭의는 단번에 이루어지고 성화는 평생 계속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습니다. 이것을 칭의라고 합니다. 칭의는 인간이 점점 의로워져서 얻는 보상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하나님께서 죄인을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은혜입니다.
그러나 칭의받은 사람이 곧바로 모든 생각과 습관과 감정에서 완전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의롭다 하신 사람을 실제 삶에서도 그리스도를 닮도록 변화시키십니다. 이것을 성화라고 합니다.
칭의는 법정의 선언이며, 성화는 삶의 변화입니다.
칭의는 단번에 이루어지며, 성화는 평생 계속됩니다.
칭의는 완전하지만, 성화는 아직 진행 중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순간 우리는 죄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죄와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됩니다. 이전에는 죄를 주인으로 섬겼지만, 이제는 죄를 대적하기 시작합니다. 죄는 여전히 우리 안에 남아 있지만 더 이상 정당한 왕은 아닙니다.
죄의 왕권은 무너졌지만 잔당은 남아 있습니다
전쟁에서 수도가 함락되고 왕이 패배했다고 해서 모든 전투가 즉시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패잔병들이 산과 골짜기에 남아 저항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죄의 결정적인 권세는 무너졌습니다. 신자는 더 이상 죄의 종이 아닙니다. 그러나 옛 습관과 왜곡된 욕망, 상처와 자기중심성은 여전히 남아 우리를 공격합니다.
죄의 통치는 끝났지만 죄와의 전투는 계속됩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죄와 싸운다는 사실은 구원이 없다는 증거라기보다, 오히려 새로운 생명이 시작되었다는 증거일 수 있습니다. 죽은 사람은 싸우지 않습니다. 죄를 죄로 느끼지 못했던 사람이 이제 죄 때문에 괴로워하고 하나님께 돌아가기를 원한다면, 그 마음속에서 성령께서 일하고 계신 것입니다.
거듭남은 인격을 지우는 일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사람을 새롭게 하신다고 해서 그의 기억과 성격, 삶의 경험과 몸의 습관이 한순간에 모두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랜 세월 형성된 분노의 방식, 사람을 대하는 태도, 욕망의 습관, 상처에 반응하는 방식은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불안을 피하기 위해 거짓말을 배웠고, 어떤 사람은 상처받지 않기 위해 먼저 공격하는 법을 익혔으며, 어떤 사람은 인정받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과장해 왔습니다.
예수님을 믿은 뒤에도 그러한 마음의 길은 남아 있습니다. 비가 오면 물이 오래된 골을 따라 흐르듯, 유혹이 오면 마음은 익숙한 죄의 방향으로 흘러가려 합니다.
성화란 단순히 나쁜 행동 몇 가지를 끊는 일이 아닙니다. 오래된 마음의 길을 버리고, 말씀과 성령을 따라 새로운 길을 만드는 과정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인격을 파괴하여 다른 사람으로 교체하지 않으십니다. 왜곡된 부분을 치유하시고, 죄에 사용되던 성품과 능력을 거룩한 목적에 사용하도록 새롭게 하십니다.
신자 안에는 육신의 욕망과 성령의 소욕이 충돌합니다
바울은 성령의 소욕과 육체의 소욕이 서로 대적한다고 말합니다(갈 5:17). 여기서 육체는 단순히 물질적인 몸이 악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 없이 자기 욕망을 중심으로 살려는 타락한 인간의 성향을 가리킵니다.
신자 안에는 이전에는 없던 새로운 갈망이 생깁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싶고, 말씀에 순종하고 싶으며, 다른 사람을 용서하고 정결하게 살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동시에 옛 욕망도 남아 있습니다. 자기를 높이고 싶고, 상처 준 사람에게 복수하고 싶으며, 편안함을 위해 진실을 외면하고 싶은 마음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에는 내적인 충돌이 있습니다.
기도하고 싶으면서도 기도를 미룹니다.
용서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미움을 품습니다.
정직하게 말하려 하면서도 손해가 두려워 진실을 감춥니다.
이 갈등 자체가 구원의 실패를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이전에는 죄와 평화롭게 살던 사람이 이제 죄를 불편해하며 싸우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문제는 싸움이 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싸움을 포기하고 죄와 화해하는 데 있습니다.
신자는 죄를 짓지만 죄를 삶의 집으로 삼지는 않습니다
요한일서는 죄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라고 선언합니다(요일 1:8). 동시에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죄를 짓지 않는다고도 말합니다(요일 3:9).
이 두 말씀은 모순이 아닙니다. 신자가 현실에서 단 한 번도 죄를 범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죄를 지속적인 삶의 방식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신자는 죄에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죄를 정상이라고 부르며 편안히 머물 수는 없습니다. 죄를 사랑하고 합리화하며 회개를 거부하는 삶은 거듭난 사람의 삶과 어울리지 않습니다.
넘어지는 것과 누워 사는 것은 다릅니다.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납니다(잠 24:16). 그가 의로운 까닭은 한 번도 넘어지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넘어질 때마다 하나님을 향해 다시 일어서기 때문입니다.
위선자는 죄를 숨기며 자신을 의롭게 보이려 합니다. 그러나 회개하는 사람은 죄를 인정하고 그리스도의 은혜 앞으로 나아갑니다.
죄를 더 많이 깨닫는 것도 성령의 역사입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할수록 오히려 자신이 더 죄인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처음 믿었을 때보다 죄가 많아진 것 같고, 마음속의 어둠이 더 선명하게 보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반드시 뒤로 물러났다는 뜻은 아닙니다. 빛이 밝아질수록 먼지가 더 잘 보이기 때문입니다.
어두운 방에서는 먼지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햇빛이 창문으로 들어오면 공중에 떠다니는 작은 먼지까지 드러납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비추실수록 이전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교만과 시기, 자기연민과 숨은 탐욕을 발견하게 됩니다.
성장은 자신이 점점 괜찮은 사람이라고 느끼는 데만 있지 않습니다. 자신의 죄를 더 깊이 깨닫고 그리스도의 은혜를 더욱 의지하는 데 있습니다.
바울은 사역 초기에는 자신을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고 말했고, 후에는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자라고 했으며, 말년에는 자신을 죄인 중의 괴수라고 고백했습니다(고전 15:9, 엡 3:8, 딤전 1:15).
그가 점점 악한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자신의 죄를 더 깊이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왜 죄성을 즉시 제거하지 않으십니까?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면 신자가 회심하는 순간 모든 죄성을 없애실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대개 성화를 오랜 과정으로 이루십니다.
그 이유를 모두 알 수는 없지만, 성경은 이 과정을 통해 신자가 겸손과 인내, 의존과 순종을 배우게 된다고 가르칩니다.
만일 회심과 동시에 완전해진다면 우리는 은혜보다 자신의 완전함을 자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매일 자신의 연약함을 발견하기 때문에 우리는 십자가를 떠날 수 없습니다.
남아 있는 죄와의 싸움은 우리를 절망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가르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자신의 힘을 신뢰하는 강한 사람이 되기보다, 은혜를 의지하는 거룩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가시가 남아 있는 것은 아프지만, 그 가시를 통해 은혜가 족하다는 사실을 배우기도 합니다(고후 12:9).
하나님은 죄를 허용하시지만 죄를 방치하지 않으십니다
신자가 죄를 지을 때 하나님은 무관심하지 않으십니다. 말씀으로 책망하시고, 성령으로 마음을 찌르시며, 때로는 징계를 통해 돌이키십니다.
징계는 하나님이 자녀를 버리셨다는 뜻이 아니라 자녀로 대하신다는 뜻입니다(히 12:6). 하나님은 죄를 용서하시지만 죄 가운데 편안히 살도록 내버려 두지는 않으십니다.
은혜는 죄의 허가증이 아닙니다. 죄에서 돌아올 수 있도록 열어 놓으신 문입니다.
죄를 반복한다고 해서 회개가 모두 거짓인 것은 아닙니다
같은 죄를 반복하면 자신의 회개를 의심하게 됩니다. 다시 화를 냈고, 또 음란한 생각에 넘어졌으며, 다시 사람의 인정을 탐했다면 이전의 회개는 거짓이었던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물론 죄를 버릴 뜻 없이 입술로만 용서를 구하는 것은 참된 회개가 아닙니다. 그러나 죄를 진심으로 미워하면서도 연약하여 다시 넘어지는 것과, 죄를 사랑하며 계획적으로 반복하는 것은 구별해야 합니다.
참된 회개는 다시는 넘어지지 않겠다는 자기 확신이 아닙니다. 넘어질 때마다 죄를 변명하지 않고 하나님께 돌아가는 태도입니다.
성화는 언제나 직선으로 올라가지 않습니다. 때로는 제자리걸음처럼 보이고, 어느 날은 크게 후퇴한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실패까지 사용하여 사람을 더 겸손하고 진실하게 만드십니다.
신자의 소망은 자신의 회개가 완벽하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속죄가 완전하다는 데 있습니다.
죄를 이기는 일에는 은혜의 수단이 필요합니다
죄는 단순히 강한 의지만으로 이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과 기도, 성례와 교회의 교제, 고백과 순종을 통하여 우리를 변화시키십니다.
말씀은 죄를 분별하는 빛이 됩니다.
기도는 유혹 앞에서 하나님을 의지하게 합니다.
성도의 교제는 숨겨진 죄를 드러내고 서로 붙들게 합니다.
성찬은 우리의 구원이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있음을 되새기게 합니다.
죄를 이기려면 죄를 단지 참는 데서 그치지 않고, 죄가 약속하는 거짓 기쁨보다 하나님 안의 더 큰 기쁨을 발견해야 합니다.
탐욕은 하나님보다 재물이 안전하다고 말합니다.
음란은 하나님이 주신 사랑보다 욕망이 더 만족스럽다고 속입니다.
교만은 하나님의 인정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속삭입니다.
죄의 뿌리는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더 믿고 사랑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화는 행동을 통제하는 일만이 아니라 마음의 예배 대상을 바꾸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죄와 싸우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믿어도 죄를 짓는 이유는 구원이 아무런 효력이 없기 때문이 아닙니다. 구원이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죄의 형벌에서 구원받았습니다.
죄의 지배에서 해방되고 있습니다.
마지막에는 죄의 존재 자체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질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미’와 ‘아직’ 사이를 살아갑니다.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이 되었지만, 아직 부활의 완성에 이르지 않았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아직 모든 면에서 그리스도를 닮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죄를 지었다고 절망하여 그리스도에게서 도망쳐서는 안 됩니다. 죄를 가지고 그리스도께 나아가야 합니다.
병든 사람이 병원에서 도망친다고 나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더러운 손을 보았다고 물에서 멀어져서는 깨끗해질 수 없습니다. 죄를 발견할수록 십자가 가까이 가야 합니다.
죄보다 크신 은혜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신앙의 성숙은 죄를 가볍게 여기는 것도 아니고, 죄 때문에 자신을 완전히 포기하는 것도 아닙니다. 죄를 심각하게 바라보면서도 그리스도의 은혜를 더 크게 바라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를 지을 때마다 자신의 연약함을 발견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십자가가 얼마나 필요한지도 발견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한 번도 넘어지지 않는 사람이 아닙니다. 넘어질 때마다 어디로 돌아가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입니다. 죄를 숨기는 사람이 아니라 고백하는 사람이며, 자신의 의를 붙드는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를 붙드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믿어도 죄를 짓습니다. 그러나 믿기 전과 똑같지는 않습니다.
이전에는 죄가 우리를 지배했지만 이제는 죄와 싸웁니다.
이전에는 죄를 변명했지만 이제는 죄를 슬퍼합니다.
이전에는 하나님에게서 달아났지만 이제는 넘어져도 하나님께 돌아옵니다.
완전함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변화는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서 포기하지 않고 일하십니다. 오래된 죄의 뿌리를 뽑고, 굳어진 마음을 부드럽게 하며, 넘어지는 걸음을 다시 세우십니다. 때로 변화가 더뎌 보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시작하신 일을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것입니다(빌 1:6).
죄가 신자의 삶에 남아 있지만 마지막 주인은 아닙니다. 마지막 말씀은 죄가 아니라 은혜이며, 마지막 모습은 실패한 옛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닮은 새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