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세상을 선하게 창조하셨는데 왜 악이 존재하는가

하나님은 세상을 선하게 창조하셨는데 왜 악이 존재하는가

성경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지으신 뒤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선언한다(창 1:31). 빛과 어둠은 자리를 얻었고, 바다와 땅은 경계를 이루었으며, 생명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창조주를 노래했다. 처음 세계에는 균열이 없었다. 죽음은 삶의 그림자가 아니었고, 사랑은 의심을 품지 않았으며, 인간은 하나님과 서로에게서 숨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에는 전쟁과 질병, 폭력과 배신, 재난과 죽음이 있다. 선하신 하나님이 만드신 세계에 악은 어디에서 들어왔는가. 하나님이 악을 창조하지 않으셨다면, 악은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가.

악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물질이 아니다

기독교 전통은 악을 하나님께서 따로 만들어 내신 어떤 실체로 보지 않는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악을 선의 결핍이라고 설명했다. 악은 선과 나란히 창조된 또 하나의 존재가 아니라, 선한 것이 마땅한 질서에서 이탈한 상태이다.

어둠은 빛과 대등한 물질이 아니라 빛의 부재이며, 썩음은 열매와 별도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생명이 무너진 상태이다. 거짓은 새로운 진리가 아니라 진리가 뒤틀린 것이고, 미움은 사랑과 대등한 창조물이 아니라 사랑이 자기중심성으로 부패한 모습이다.

하나님은 악을 창조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선한 의지와 자유와 욕망이 하나님에게서 벗어날 때 악이 생겨났다.

악은 창조의 작품이 아니라 창조의 왜곡이다.

자유는 사랑의 가능성이자 반역의 가능성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돌이나 기계처럼 만들지 않으셨다.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시고,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며 자유롭게 순종할 수 있는 인격적 존재로 창조하셨다.

그러나 자유롭게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은 사랑하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는 뜻이다. 거절할 수 없는 사랑은 사랑이라기보다 작동 방식에 가깝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진실한 관계의 존엄을 주셨고, 인간은 그 자유를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높이는 데 사용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은 사건은 단순히 금지된 과일을 훔쳐 먹은 일이 아니다. 그것은 피조물이 선과 악의 기준을 하나님에게서 받지 않고 스스로 결정하겠다는 선언이었다.

죄의 첫 문장은 언제나 비슷하다.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될 수 있다.
무엇이 선하고 악한지는 내가 결정한다.

인간은 하나님에게서 독립하려 했지만, 생명의 근원에서 벗어난 자유는 자유가 아니라 붕괴가 되었다.

도덕적 악과 자연적 고통은 어떻게 연결되는가

악에는 인간의 선택에서 비롯된 도덕적 악이 있다. 살인과 거짓, 착취와 전쟁, 배신과 폭력이 여기에 속한다. 이러한 악의 책임을 하나님께 돌릴 수 없다. 칼을 만든 자와 그 칼로 사람을 해친 자는 같지 않다.

그러나 지진과 질병, 태풍과 죽음처럼 인간의 직접적인 선택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고통도 있다. 이를 자연적 악이라고 부른다.

성경은 인간의 타락이 개인의 내면에만 머물지 않고 창조 세계 전체에 균열을 가져왔다고 말한다. 땅은 가시와 엉겅퀴를 내고, 인간은 흙으로 돌아가며, 피조물은 썩어짐의 종노릇 아래에서 함께 탄식한다(창 3:17-19, 롬 8:20-22).

이것은 모든 재난이 특정한 개인의 죄 때문에 일어난다는 뜻이 아니다. 예수님은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죽은 사람들이 다른 이들보다 더 죄가 많았던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눅 13:4-5).

고통은 때때로 개인의 잘못에 대한 직접적인 형벌이 아니라, 창조 질서 전체가 아직 회복되지 않았음을 보여 주는 상처이다. 세계는 아름답지만 온전하지 않다. 봄은 오지만 꽃은 지고, 아이는 태어나지만 인간은 늙으며, 사랑은 피어나지만 죽음은 이별을 만든다.

자연은 하나님의 첫 창조와 마지막 회복 사이에서 신음한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창조의 처음도 아니며 완성된 마지막도 아니다. 우리는 에덴과 새 예루살렘 사이, 선한 창조와 완전한 새 창조 사이를 살아간다.

그러므로 자연의 아름다움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보여 주고, 자연의 고통은 세계가 아직 구원을 기다리고 있음을 보여 준다. 꽃은 창조를 증언하고, 가시는 타락을 증언한다. 그러나 봄마다 새싹이 돋는 것은 회복의 약속을 희미하게 들려준다.

하나님은 왜 악을 즉시 제거하지 않으시는가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면 악이 발생한 순간 곧바로 없애실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모든 악을 즉시 심판하신다면, 심판은 언제나 다른 사람에게만 향하지 않는다. 악은 전쟁터와 감옥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 안에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잔혹한 폭력은 심판해 달라고 요청하면서도, 자신의 탐욕과 거짓과 미움에는 오래 참아 달라고 바란다. 하나님께서 악을 즉시 제거하신다면 우리 가운데 누가 설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은 악에 대한 무관심이 아니다. 회개할 시간을 주시는 자비이다. 심판이 지연되는 것은 정의가 사라졌기 때문이 아니라, 은혜의 문이 아직 닫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내에는 끝이 있다. 성경은 악이 영원히 방치되지 않으며, 모든 은밀한 일이 심판받을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침묵은 승인도 아니며 무능도 아니다. 아직 마지막 판결이 내려지지 않았을 뿐이다.

하나님은 악을 선으로 바꾸실 수 있다

하나님은 악을 선이라고 부르지 않으신다. 배신은 여전히 배신이고, 살인은 여전히 살인이며, 고통은 결코 아름다운 장식물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악이 자신의 목적을 무너뜨리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신다.

요셉의 형들은 그를 미워하여 노예로 팔았다. 그들의 행동은 명백한 악이었다. 그러나 요셉은 훗날 고백한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셨나니(창 50:20).

하나님은 형들의 죄를 조종하여 죄짓게 하신 것이 아니다. 그들이 행한 악을 심판받을 악으로 남겨 두시면서도, 그 악이 요셉과 이스라엘을 멸망시키지 못하도록 더 큰 섭리 안에서 다스리셨다.

하나님의 섭리는 악을 미화하는 힘이 아니라, 악조차 마지막 말을 하지 못하게 하는 능력이다.

십자가는 악의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이다

악의 문제 앞에서 기독교가 제시하는 가장 깊은 대답은 논리적 설명이 아니라 십자가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는 인간의 악이 모였다. 종교 지도자의 시기, 유다의 배신, 군중의 변덕, 로마 권력의 폭력이 무죄한 이를 죽였다. 십자가는 인류 역사에서 가장 부당한 악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로 그 자리에서 구원을 이루셨다. 악이 생명을 죽이는 순간, 하나님은 죽음을 통하여 생명의 길을 여셨다. 사탄은 십자가를 하나님의 패배로 만들려 했지만, 하나님은 십자가로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셨다.

하나님은 고통받는 인간에게 멀리서 철학적 답변만 보내지 않으셨다. 그리스도 안에서 고통 속으로 들어오셨다. 채찍을 맞으셨고, 버림받으셨으며, 죽음의 어둠을 지나셨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고난을 설명하기만 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고난을 짊어지신 하나님이다.

악의 마지막은 이미 결정되어 있다

악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하나님이 패배하셨다는 뜻이 아니다. 악은 아직 활동하지만 영원하지 않다. 십자가와 부활에서 악의 최종 패배는 이미 결정되었다.

성경의 마지막 장면에는 죽음과 애통과 곡하는 것과 아픔이 사라진다. 하나님께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시며 만물을 새롭게 하신다(계 21:4-5).

새 창조는 현재의 고통을 가볍게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단 하나의 눈물도 잊지 않으시며, 악이 파괴한 것을 온전히 회복하실 것이라는 약속이다.

지금은 찢어진 천의 뒷면만 보는 것처럼 혼란스러울 수 있다. 매듭과 끊어진 실만 보여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하나님은 앞면에서 구원의 무늬를 완성하고 계신다.

악보다 오래 남는 것은 하나님의 선하심이다

하나님은 세상을 선하게 창조하셨다. 악은 하나님의 작품이 아니라 피조물의 자유가 창조 질서를 거스르며 생긴 왜곡이다. 인간의 타락은 관계와 자연과 죽음의 질서에 깊은 균열을 만들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악을 방치하지 않으셨다. 악을 제한하시고, 심판하시며, 십자가를 통하여 그 권세를 꺾으셨고, 마침내 새 창조에서 완전히 제거하실 것이다.

우리는 아직 왜 특정한 고통이 허락되었는지 모두 알지 못한다. 악의 문제에는 이론으로 닫을 수 없는 눈물의 여백이 남아 있다. 그러므로 고통받는 사람 앞에서는 설명보다 함께 우는 일이 먼저이다.

그러나 신자는 한 가지를 믿는다. 악이 오래되어 보여도 영원하지 않으며, 어둠이 깊어 보여도 빛을 이기지 못한다는 것이다.

악은 창조의 첫 문장이 아니었다.
악은 역사의 마지막 문장도 되지 못한다.

첫 문장은 하나님의 선하심이었고, 마지막 문장은 하나님의 회복일 것이다. 그 사이에서 십자가는 우리에게 말한다. 하나님은 악을 가볍게 여기지 않으시며, 악에 상처 입은 세계를 결코 버리지 않으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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