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장 2절의 혼돈과 그리스도인
창세기 1장 2절의 혼돈과 그리스도인
창세기 1장 2절은 아직 빛이 비치지 않은 세계를 보여 줍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성경의 첫 장면은 완성된 정원이나 빛나는 별이 아닙니다. 형태를 갖추지 못한 땅, 채워지지 않은 공간, 깊은 물 위를 덮은 어둠입니다. 그러나 그 어둠보다 먼저 읽어야 할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그 수면 위에 운행하고 계셨다는 사실입니다.
혼돈과 공허는 무엇을 뜻하나요?
“혼돈하고 공허하다”는 표현은 히브리어로 토후 바보후(תֹהוּ וָבֹהוּ)입니다. 토후는 형태가 정해지지 않은 황량함과 무질서를, 보후는 채워지지 않은 비어 있음을 가리킵니다. 이는 하나님과 대등한 악의 세력이 창조를 방해하고 있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아직 세계가 생명이 거주할 수 있는 질서와 충만함을 갖추지 못했다는 뜻에 가깝습니다.
창세기 1장의 이후 전개를 보면 하나님께서는 먼저 형태를 만드시고, 그 형태를 생명으로 채우십니다. 빛과 어둠을 나누시고, 위의 물과 아래의 물을 구별하시며, 바다와 땅의 경계를 정하십니다. 그다음 해와 달과 별, 새와 물고기, 동물과 사람으로 세계를 채우십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혼돈을 질서로, 공허를 충만으로 바꾸시는 사역입니다.
우리의 삶에도 혼돈의 시간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한다고 해서 삶이 언제나 분명하게 정리되는 것은 아닙니다.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모르고, 관계의 방향도 보이지 않으며, 지금까지 쌓아 온 것이 무너지는 듯한 때가 있습니다. 기도해도 대답이 없는 것 같고, 하나님이 무엇을 하고 계신지도 알 수 없습니다.
그때 우리의 내면은 창세기 1장 2절과 닮아 있습니다. 생각은 엉켜 있고, 마음은 비어 있으며, 앞날은 어둠에 덮여 있습니다.
우리는 혼돈을 만나면 곧 실패라고 판단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버리신 것 아닐까요?”
“내가 잘못된 길로 온 것은 아닐까요?”
“이제는 모든 것이 끝난 것 아닐까요?”
그러나 창세기 1장 2절은 혼돈이 반드시 하나님의 부재를 뜻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눈에 보이는 질서는 아직 없었지만 하나님의 영은 이미 그 위에 계셨습니다. 아무 일도 시작되지 않은 것처럼 보였으나, 창조는 이미 하나님의 임재 안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십니다
“운행하다”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메라헤페트(מְרַחֶפֶת)입니다. 새가 둥지 위에서 날갯짓하며 새끼를 품고 보호하는 모습을 연상시키는 말입니다. 신명기 32장 11절에서도 독수리가 새끼 위를 너풀거리는 장면에 유사한 표현이 사용됩니다.
하나님의 영은 혼돈을 멀리서 구경하고 계시지 않았습니다. 깊음 위에 가까이 머무시며, 장차 생명이 일어날 세계를 품고 계셨습니다.
우리도 삶이 무너질 때 하나님이 멀리 계신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성령은 정리된 사람에게만 임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말이 되지 않는 탄식과 방향을 잃은 마음 위에 가까이 계십니다. 로마서 8장은 성령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고,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친히 간구하신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기도를 잘 정리하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무엇을 구해야 할지 모를 때에도 성령은 우리 안에서 일하십니다. 하나님은 완성된 사람만 사용하지 않으십니다. 아직 형태를 갖추지 못한 삶 위에도 머무시며 새로운 질서를 준비하십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혼돈을 다루십니다
혼돈 가운데 가장 먼저 들린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빛이 있으라.”
하나님은 어둠과 긴 논쟁을 벌이지 않으셨습니다. 말씀하셨고, 빛이 생겼습니다. 창조의 질서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우리의 내면이 혼란할수록 더 많은 정보와 사람의 말에 매달리기 쉽습니다. 그러나 수많은 목소리가 오히려 혼돈을 깊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필요한 첫 번째 질서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다시 서는 것입니다.
말씀은 모든 문제의 세부적인 답을 즉시 알려 주는 설명서가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이 빛이고 무엇이 어둠인지 구별하게 합니다.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사랑해야 하는지, 무엇을 내려놓아야 하는지를 다시 가르칩니다.
말씀이 임하면 환경이 곧바로 달라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내 안에 경계가 생깁니다. 사실과 두려움을 구분하고, 책임과 지나친 죄책감을 나누며, 내가 할 일과 하나님께 맡길 일을 분별하게 됩니다.
혼돈은 새로운 창조의 시작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안정된 것을 좋아합니다. 익숙한 관계, 분명한 계획, 예측 가능한 내일을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때로 우리가 의지하던 질서가 흔들리는 것을 허락하십니다.
그것은 우리를 파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잘못 세워진 질서를 새롭게 하시기 위해서일 수 있습니다. 사람의 인정 위에 세운 자아, 성공만을 목적으로 삼았던 열심, 두려움에 붙들린 관계가 무너질 때 우리는 혼돈을 경험합니다.
하지만 모든 무너짐이 파괴는 아닙니다. 어떤 무너짐은 재창조의 시작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나왔지만 곧바로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광야라는 혼돈의 시간을 지나야 했습니다. 광야에는 익숙한 길도, 안정된 양식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하나님은 만나를 주시고, 말씀을 가르치며, 노예였던 백성을 언약 공동체로 빚으셨습니다.
우리의 광야도 이와 비슷할 수 있습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고 과거로 돌아갈 수도 없을 때, 하나님은 새로운 정체성과 새로운 길을 만드십니다.
공허를 잘못된 것으로 채우지 말아야 합니다
혼돈만큼 견디기 어려운 것이 공허입니다. 마음이 비어 있으면 사람은 무엇이든 붙잡으려 합니다. 소비, 관계, 인정, 쾌락, 일중독으로 빈자리를 서둘러 채웁니다.
그러나 공허를 급하게 채우면 더 큰 혼란이 생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채우셔야 할 자리를 다른 것으로 채우기 때문입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빈 공간을 무작위로 채우지 않으셨습니다. 각 영역에 맞는 생명을 두셨습니다. 하늘에는 새를, 바다에는 물고기를, 땅에는 생물과 인간을 두셨습니다. 하나님의 충만함에는 질서와 목적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마음이 비어 있다고 해서 아무 관계나 붙잡지 말아야 합니다. 외롭다고 해서 자신을 해치는 사랑을 선택해서도 안 되고, 불안하다고 해서 돈과 성공을 신으로 삼아서도 안 됩니다. 공허한 시간에는 무엇으로든 채우기보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채우려 하시는지 기다릴 필요가 있습니다.
질서는 통제가 아니라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혼란을 벗어나기 위해 모든 것을 통제하려 합니다. 일정과 사람과 미래를 완벽하게 관리하면 평안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적 질서는 인간이 모든 것을 통제하는 상태가 아닙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각각의 존재를 제자리에 두시는 상태입니다.
신앙은 모든 일을 내 계획대로 정리하는 능력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이시며, 나는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에는 책임을 다하고, 할 수 없는 일은 하나님의 손에 맡기는 것입니다.
혼돈 속에서 우리가 가장 먼저 회복해야 할 질서는 환경이 아니라 관계입니다. 하나님과 나의 관계가 제자리를 찾을 때, 다른 것들도 조금씩 자리를 찾아갑니다.
혼돈 위에도 하나님은 계십니다
창세기 1장 2절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세계의 모습입니다. 빛도, 땅의 생명도, 사람도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장면은 절망의 장면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이 운행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지금 삶이 혼돈하고 공허하게 느껴져도 그것이 마지막 모습은 아닙니다. 오늘 아무런 길이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께서는 빛을 부르실 수 있습니다. 무너진 경계를 다시 세우시고, 비어 있는 마음에 새로운 생명을 채우실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혼돈 속에서 성급하게 결론을 내리지 않는 것입니다. 어둡다고 해서 하나님이 떠나셨다고 단정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직 형태가 없다고 해서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완성된 곳에서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혼돈하고 공허하며 어두운 곳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혼돈 속에서도 소망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질서가 있는 곳만 지키시는 분이 아니라, 혼돈 가운데 들어오셔서 새로운 질서를 만드시는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의 삶 위에도 성령께서 운행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때가 되면 어둠 속에 다시 말씀이 들릴 것입니다.
“빛이 있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