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을 미워하지 않는 방법 7가지

  남을 미워하지 않는 방법 7가지 1) 미움을 ‘도덕 문제’가 아니라 ‘방어 정서’로 재정의하는 일이다 미움은 흔히 인격의 결함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경계 반응이다. 진화심리학 관점에서 인간은 집단 안에서 위협과 배신, 무임승차자를 빠르게 감지해 배제하도록 발달한 경향이 있다. 그러니 미움이 치밀 때 나는 나쁜 사람이 아니라 내 뇌가 위험 신호를 켠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출발점이다. 미움을 경계, 상처, 두려움 같은 단어로 바꾸어 부르면 편도체 중심의 즉각 반응이 전전두엽의 해석으로 옮겨가며 감정의 온도가 내려가는 방향으로 움직이기 쉽다. 2) ‘의도 추정’을 멈추고 ‘관찰 가능한 사실’로 이동하는 일이다 관계심리학에서 갈등은 사건 그 자체보다 해석에서 커진다. 미움은 상대의 행동에 저 사람은 원래 그런 사람이다 같은 성격 귀인과 나를 해치려 했다 같은 의도 추정을 붙일 때 굳어진다. 뇌는 애매함을 싫어해 빠른 결론으로 불안을 줄이려 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훈련할 질문은 단순하다. 그가 한 행동은 무엇인가, 내가 확인한 사실은 어디까지인가이다. 의도를 추정하는 대신 관찰된 행동만 적으면 내러티브가 줄고 적개심은 느슨해진다. 3) 생각보다 먼저 ‘신체 각성’을 낮추는 일이다 미움은 머리로만 생기는 것이 아니라 몸의 상태와 결합된 정서이다. 교감신경이 올라가 심박과 근육 긴장이 증가하면 뇌는 위험을 전제로 정보를 처리한다. 이때는 논리로 설득해도 잘 바뀌지 않는다. 먼저 길게 내쉬는 호흡, 짧은 걷기, 찬물 세수, 스트레칭 같은 상향식 조절이 필요하다. 몸이 진정되면 전전두엽의 억제 기능이 회복되어 상대를 흑백으로 재단하는 경향이 약해진다. 미움을 다스리는 첫 기술은 논쟁이 아니라 생리 조절이다. 4) 경계와 분리를 ‘비폭력적 형태’로 구조화하는 일이다 남을 미워하지 않는다는 것은 모든 것을 받아들이라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건강한 경계가 없을 때 미움이 쌓인다. 관계심리학의 핵심은 좋아함보다 규칙이다. 싫은 행동을 구체적으로 말하고(예: 늦은 밤 ...

하루를 살아가는 7가지 지혜

하루를 살아가는 지혜는 거창한 결심이 아니라, 오늘이라는 작은 시간에 무엇을 붙들지 정하는 기술이다. 고대의 현자들은 인간이 흔들리는 존재임을 정직하게 보았고, 현대의 사람들은 그 흔들림을 다루는 도구를 만들었다. 둘을 엮으면, 하루를 버티는 처방이 아니라 하루를 세우는 지혜가 된다. 첫째, 아침에 뜻을 세우는 일이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하루를 맞을 때 마음의 ‘방향’을 먼저 정하라고 말한 셈이다. 오늘 겪을 수 있는 불편, 갈등, 유혹을 미리 떠올리고도 흔들리지 않겠다는 결의를 세우는 일이다. 현대의 습관 연구가 말하는 “의도 설정”도 같은 결이다. 오늘의 가장 중요한 한 문장을 정하는 것이다. 나는 오늘 무엇을 위해 이 시간을 쓰는가, 이 질문에 답이 있는 날은 휘둘리지 않게 되는 날이다. 둘째, 욕망을 다스리는 기술이다. 플라톤이든 불교의 수행자든 인간의 내면에는 끌림과 충동이 있고, 그것이 삶을 흔든다고 보았다. 현대인은 이를 ‘도파민’이라는 언어로 말하며, 자극의 과잉이 집중과 만족을 갉아먹는다고 말한다. 그러니 하루에 한 번은 자극을 줄이는 결단이 필요하다. 알림을 끄고, 화면을 내려놓고, 짧은 고요를 확보하는 일이다. 욕망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욕망의 운전대를 다시 잡는 일이다. 셋째, 할 일을 줄이는 용기이다. 노자는 ‘비움’의 지혜를 말했고, 많은 현자들은 과잉의 삶이 사람을 불안하게 만든다고 보았다. 현대의 생산성 담론도 결국 “선택과 집중”을 말한다. 하루에 핵심 과업을 하나로 좁히는 것이 지혜이다. 오늘 반드시 해야 할 한 가지를 정하고, 나머지는 ‘안 하는 목록’에 넣는 일이다. 삶은 무엇을 더 하느냐보다 무엇을 덜 하느냐로 선명해지는 날이 많다. 넷째, 관계를 정돈하는 일이다. 공자는 인간을 관계적 존재로 보았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좋은 삶을 위해 우정과 공동체를 중요하게 여겼다. 현대 심리학도 사회적 연결이 행복과 회복탄력성에 깊게 관련된다고 말한다. 그래서 하루의 지혜는 관계에서 드러난다. 짧더라도 먼저 안부를 묻고, 감사 한 ...

주일 대표기도문 2025년 11월 23일

2025년 11월 23일 주일 대표기도문 거룩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나님 아버지. 계절을 따라 때를 따라 열매 맺게 하시며, 온 우주 만물을 주관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이 땅에 햇살을 비추시고 바람을 불게 하시며, 깊은 밤 고요함 속에서도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시는 주의 손이 오늘도 우리를 품으셨기에, 감사의 마음으로 주 앞에 모여 예배하게 하심을 찬송합니다. 산천초목이 누렇게 익어 가을의 옷을 입고, 들판에는 이삭이 고개를 숙이듯, 저희도 하나님의 은혜 앞에 머리 숙여 감사를 올려드립니다. 한 해의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는 이 시점에도, 주께서 베푸신 은총과 인도하심은 멈춤이 없었사오니, 그 모든 것 위에 높임 받으소서. 주님, 이 시간 저희는 지난 한 주간, 아니 올해를 돌아보며 고백합니다. 주의 뜻보다 나의 생각을 앞세웠고, 주의 말씀보다 세상의 소리에 귀 기울였으며, 이웃의 아픔보다 나의 유익을 먼저 여겼음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감사할 조건이 넘쳐남에도 불구하고 불평을 입에 달고 살았고, 기도할 수 있는 시간 속에서도 염려에 빠져 무너졌던 저희의 연약함을 주께 올려드리오니, 십자가의 보혈로 정결케 하여 주시고 새롭게 하여 주옵소서. 이 시간 간절히 간구하오니, 먼저 우리 사랑하는 성도들의 믿음을 붙들어 주옵소서. 세상 유혹이 밀물처럼 밀려와도 흔들리지 않게 하시고, 고난과 시련 속에서도 하늘 소망을 놓치지 않도록 은혜 위에 은혜를 더하여 주옵소서. 연약한 믿음 위에 성령의 기름을 부어주사, 다시금 주의 말씀을 사모하고 그 말씀 따라 살아가는 삶이 되게 하옵소서. 주여,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 날마다 주와 동행하게 하소서. 아침에는 주의 자비를, 저녁에는 주의 진실하심을 노래하게 하시고, 발걸음마다 주의 평강으로 인도하사 주님의 향기를 풍기는 삶이 되게 하옵소서. 사람들이 우리를 볼 때,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고백하게 하소서. 우리 교회를 위하여 기도합니다. 이 작은 등불을 통하여 이 지역과 열방이 밝아지게 하시고, 예배의 불길이 식지 않게 하옵소서...

expedition in bible

expedition in bible 성경탐험 성경은 모두 66권이다. 구약 39권, 시약 27권이다. 쉽게 외우기 위해 간단한 공식을 만들 수 있다.  3 ×9=27 구약과 신약의 차이는 구약은 오실 메시야이고, 신약은 오신 메시야와 다시오실 메시야에 대한 기록이다. 원저자는 하나님이며, 유기적 영감(헤르만 바빙크)을 통해  32명의 저자들이 사용되었다. 

현대신학의 태동

현대신학의 태동 현대신학이라 함은 인간의 자율을 강조하고 성경을 더 이상 계시가 아닌 인간의 이성에 의하여 비평되어야할 인간의 책으로 바라보는 신학이다 라고 정의할 수 있다. 현대신학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자율' 이다. 인간의 이성이 주체가 되어 모든 것을 판단하고 평가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현대신학의 태동은 이미 종교개혁 당시 부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신학은 철학적인 측면에서 합리주의를 따르고, 과학적 측면에서 경험주의이며, 정치적 측면에서 민주주의이다. 현대신학의 태동을 종교개혁 시기로 잡는 이유는 권위적인 중세에서 종교개혁은 개인의 자율를 강조하고, 교회의 권위보다 개인의 성경 해석과 자율을 더 강조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 시기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 갈릴레이가 망원경을 통하여 직접적으로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중세의 권위에 눌려 지내 강요된 믿음에서 개인의 자율을 찾고자하는 이들에게 좋은 빌미가 되었다. 미신적인 중세 종교를 벗어나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삶을 추구하게 된 것이다. 지금까지는 선악의 판단 기준은 내가 아닌 '나의 밖'에 있는 것이었다. 특히 교회와 성경, 신이었다. 현대는 이러한 기준은 개인의 외부에서 개인 안으로 즉 '나'로 바꾸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제 '내'가 판단하고, '내'가 평가하는 것이다. 이것은 갈릴레이의 발견으로 인해 우주의 중심이 지구가 아니라 태양이라는 사실도 큰 몫을 하고있다. 현대를 정의하는 대전제는 우주와 자연는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합리적으로 어떠한 법칙을 따라 움직이고 있으며, 그러므로 과학이 발달하고 시간이 흐르면 올바른 방법을 통하여 얼마든지 모든 것을 알아 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인간에 대한 낙관주의적 평가와 인간을 계발한다면 얼마든지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인본주의적 인간관을 전제하고 있다. 진화론은 이러한 전제 속에서 끊임없는 진화를 통하여 신이 될 수도 있다는 ...

주기철 목사님의 마지막 설교

주기철 목사님의 마지막 설교 "나의 5종목의 기원"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나는 지난 7개월 동안 감옥에 있으면서 특별히 다섯 가지 종목을 들어 기도하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이 시간 그 기도내용을 중심으로 사랑하는 성도들 앞에 "5종목의 나의 기원"이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기도) "오, 하늘에 계신 거룩하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시여. 이번에야말로 순교의 영광을 허락하시는가 싶더니 또 풀어주시어 이렇게 강단에 다시 서게 되었나이다. 아직까지 제가 받은 핍박과 고난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분량에 이르지 못한 걸 알고 있사오나, 할 수만 있다면 이 고통스런 육신을 떠나 하루라도 빨리 주님과 함께 있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옵나이다. 사랑하옵는 주님이시여! 저희들을 붙들어 주시옵소서! 저 간악한 마귀의 흑암권세로부터 지켜주시옵소서! 우리의 믿음이 꺾이지 않도록 주님의 강하신 손으로 붙잡아 주시옵소서! 빛되신 주님의 생명의 말씀으로 저 어두움의 사망권세를 물리칠 수 있도록 붙들어 주시옵소서! 저 불쌍한 어린양들을 천국 가는 길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인도하시옵소서! 이제 이 종이 선포하는 주님의 말씀에 은혜 받고 힘을 얻어서 주님의 뒤를 따르는 일사각오(一死覺悟)의 믿음이 있도록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5종목의 나의 기원! 첫 번째 저의 기도는 "죽음의 권세를 이기게 하여 주옵소서"입니다. 나는 바야흐로 죽음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내 목숨을 빼앗으려는 검은 손은 시시각각으로 내 가까이에 뻗어오고 있습니다. 죽음에 직면한 나는 "사망의 권세를 이기게 하여 주옵소서"하고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무릇 생명이 있는 만물이 다 죽음 앞에서 탄식하며, 숨쉬는 인생은 모두 다 죽음 앞에서 떨고 슬퍼합니다. 사망의 권세는 마귀가 사람을 위협하는 최대의 무...
시편28 구조분석 1-5 모함당한 시인의 여호와를 향한 탄원 6-9 응답에 대한 확신과 감사, 찬양 1. 시인은 악인들에게 모함을 당하고 있다. 3절 ‘저희는 그 이웃에게 화평을 말하나 그 마음에는 악독이 있나이다’ 이러한 모함으로 인하여 시인은 무덤에 내려가는 자와 같다. 사회적으로 매장당함. 그래서 시인은 여호와께서 자신의 부르짖음에 ‘귀를 막지’말아 달라고 탄원한다. 아무것도 할수 없는 상황 속에서 시인은 오직 여호와께만 메달리고 있다. 2. 이유없이 남이 나를 비방할 때 변명하고 싶어진다. 그러나 그것은 역효과를 초래한다. 그렇게 한 자신이 초라해지고, 더 미워진다. 그 때는 여호와께 가야한다. 여호와께서 풀어야 풀린다. 스스로 풀면 더욱 꼬일 뿐이다. 3. 이것은 위기이다. 그러나 기회이다. 이 위기를 잘 풀어나가면 더 깊고, 높은 차원의 신앙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잘못 풀면 패가망신하고 만다. 그러므로 신자는 여호와께 모든 문제를 풀어야 한다. 여호와는 모든 문제의 답이 되시기 때문이다. 수많은 인생이 문제들은 모두 여호와의 손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7 여호와는 나의 힘과 나의 방패시니 내 마음이 저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그 분만이 우리의 진정한 도움이 되신다. 4. 그러므로 이 표현은 고난 당한자들 아주 중요하다. 2 내가 주의 성소를 향하여 나의 손을 들고 주께 부르짖을 때에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소서 여호와께 기도하는 것이 답이요, 진정한 문제 해결의 시작이다. 시인은 여호와께서 자신의 기도에 응답하신다는 확신을 통하여 감사와 찬양을 올리며, 기뻐하고 있다.(6-9)
웃시야왕의 사역 웃시야, 요담, 아하스, 그리고 히스기야(1:1) 그의 사역 기간은 740-680으로 약 60년동안으로 본다. 웃시야왕 : 그의 부친은 아마샤-웃시야와 공동통치, 요담의 아버지 요담(BC 750~731) 웃시야의 사망시기 739 *그는 군대를 훈련하여 약 30만명의 군사를 양육하고 재배치 *강장 현대화된 군사무기들을 만들고 제정비 *그 후에 웃시야는 갓, 야브네, 아스돗의 성벽들을 무너뜨리고 아스돗과 그 근방에 자신의 방어 기지로서 도시들을 재건하였다. *또한 유다의 오랜 적국인 블레셋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였다.(대하26:6) *사해 근방의 아라바에 살던 마온 족속(Meunites)들이 항복하였다. *마침내 암몬 족속들을 압도하였고 그들을 반식민지화함. *더욱 중요한 것은 그가 사막에 정착지를 배치하고 공학과 농경기술의 극치라고 할 수 있는 세벨라(shephelah)평원을 건설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그의 부와 군사적 성공은 그를 교만하게 함으로 몰락으로 가게하였다.(대하26:16) 먼저 그는 모세의 규례를 무시하고 성전에서 제사장을 대신하여 분향하려함.(아사랴 제사장이 상소에서 나가라고 했으나 불순종하고 억지로 분향하려 하자 갑자기 문둥병이 그에게 들었고 성소에서 나와야 했다. 그는 남은 생애를 사회로부터 격리되어 모든 통치권을 상실하고 생애를 마쳐야 했다. 심지어 그는 죽을 때에도 왕들의 묘지에 매장되지 못하고 인접한 평지에 매장되어 하나님의 성물에 대한 그의 무시가 얼마나 큰가를 보여준다.

시편 18편-2

시편 18편-2 신정론 여호와의 종 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 여호와께서 다윗을 그 모든 원수와 모든 원수와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실 날에 다윗의 이 노래의 말로 여호와께 아뢰어 가로되 다윗의 삶을 되돌아본다면 우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다윗의 후미에 관한 결과론적 고백입니다.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다윗이 사울로부터 쫓김을 당해 목숨을 담보로 하는 도피의 생활 중에 어떻게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에 관한 것입니다. 그것을 신학적으로 ‘신정론’이라고 합니다. 헬라어로 데오디시( [神正論, theodicy, 변신론, 신의론])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데오스’와 정의의 ‘디케’라는 말의 합성어이다. 말의 의미는 정의로우신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는데,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세계 안에 악과 모순이 존재하는 데에 대한 답을 찾는 고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울에게서 쫓겨 다닐 때 다윗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아마 하나님을 불공평하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무슨 큰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사울을 대적하거나 반항한 적도 없는데 이러한 식으로 고통을 당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너무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의 상황 속에서 다윗은 자신의 삶 속에 내재한 모순과 부당함을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이 되었을 것입니다. 다윗의 삶 뿐 아니라 현재 우리나라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바라보면 이러한 악의 문제에 대한 고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직 프로야구 선수의 일가족 살해 사건, 삼십대 후반의 어느 남자의 혜진 예슬이의 유괴살인 사건 등을 보면, 이 세상에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수도 없이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끝없이 이어지는 의문의 사건들, 그리고 뇌물을 써서 부당하게 판결을 내리게 하는 불의한 사람들을 볼 때에, 이 세상이 결코 합리적이거나, 공의롭지 못하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다윗은 사울에게 쫓기면서 수도 없이 이러한 질문들을 던지고 또 던졌을 것입니다. ‘내가 왜?, 내가 왜 이런 일을...

길 잃은 죄인들

길을 잃은 죄인들 인간은 타락으로 인해 ‘길’을 잃어 버린 존재입니다. 어디로 가야할지 무엇을 해야할지를 잃어버린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죄는 인간들의 눈을 멀게해서 참된 것을 바라보지 못하게 했고, 죄는 인간들의 귀를 막아 진리의 말씀을 듣지 못하도록 만들었습니다. 또한 죄는 인간들의 입을 막아 바른 말을 하지 못하도록 막아 버렸습니다. 인간이 길을 잃었다는 말은 인간의 살아갈 도리와 목적과 삶의 의미를 잃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즉 자신이 누구이며,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야하는지를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여호와 하나님을 향하여 자신을 지도해 달라고 간구하고 있습니다. 4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보이시고 주의 길을 내게 가르치소서 5 주의 진리로 나를 지도하시고 교훈하소서 주는 내 구원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종일 주를 바라나이다 8~9, 12절 역시 주의 가르침을 기대합니다. 8 여호와는 선하시고 정직하시니 그러므로 그 도로 죄인을 교훈하시리로다 9 온유한 자를 공의로 지도하심이여 온유한 자에게 그 도를 가르치시리로다 12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 누구뇨 그 택할 길을 저에게 가르치시리로다 그럼 왜 우리는 주의 지도와 가르침을 받아야 하는가? 그것은 죄로 인하여 우리의 눈과 귀가 멀었기 때문이며, 우리의 이성이 하나님을 이해하지도 깨닫지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시편기자는 불가피하게 자신의 죄악들을 여호와 앞에 고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7 여호와여 내 소시의 죄와 허물을 기억지 마시고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나를 기억하시되 주의 선하심을 인하여 하옵소서 11 여호와여 나의 죄악이 중대하오니 주의 이름을 인하여 사하소서 18 나의 곤고와 환난을 보시고 내 모든 죄를 사하소서 시인은 분명 큰 어려움과 고통 가운데 빠져있습니다. 그는 원수들로부터 조롱과 비웃음 거리가 되었습니다.(2,3,16,17,18,19,20,22) 그 이유는 아마 시인이 죄로 인하여 하나님께로부터 징계를 받았...
이미지
"어느 날 손과 발이 싸우고 있었다.발이 먼저 불평을 털어 놓았다.나는 밤낮 꼬랑내나는 구두 속에 들어가 심방이나 다니고 맛있는 음식이나 좋은 것은 한번 못 만지고 살다니.그 때 손이 대답했다.그러나 너는 언제 내 손을 씻어 주었니? 그래도 나는 너의 더러운 발을 씻어 주지 않니? 그러자 발이 말했다.그래도 너는 높은 데 붙어 있지 않니? 나는 그게 부럽단다.그 때 손이 대답했다.높은 데 있으면 뭘 하니? 무거운 것은 나혼자 들고 다니는데."
설교의 정의 강해 설교란 성경 본문의 배경에 관련하여 역사적, 문법적, 문자적, 신학적으로 연구하여 발굴하고 알아낸 성경적 개념, 즉 하나님의 생각을 전달하는 것으로서, 성령께서 그 개념을 우선 설교자의 인격과 경험에 적용하시며, 설교자들을 통하여 다시 회중들에게 적용시키는 것이다. 해돈 로빈슨. 강해설교 기독교문서선교회
매력 잃은 설교자 James stewart 하나님의 집에 대한 열정이 더 이상 그를 삼키지 않는다. 더 이상 그는 그 능력, 구원의 강력한 위대함 속을 거닐며 예수 그리스도게서 그늘 참석한 자신의 회중들 가운데 임하실 것이라는 전율에 사로잡힌 기대를 가지고 강단에 오르지 않는다. 시큰둥하고 지리하게 그 때 자신에게 세상에서 가장 극적이던 소식을 이제 이야기할 뿐이다. 하나님의 사죄하심에 관한 열정과 날카로움과 기백, 부활하신 주님의 임하심에 관한 넘치는 희락과 즐거운 확신. 초자연적인 은혜에 대한 경이. "만일 내가 설교하지 않으면 내게 화가 임하리라"고 외치려는 자세, 이 모든 것을 사라져 버렸다. 그 사람은 뜨거운 마음을 상실했다. 그는 매력을 잃어 버렸다. 게다가 그것은 그리스도의 대사에겐 비극이다. -Presaching
[설득력있는 설교]에서 좋은 글들을 발췌한 것입니다.. 저자 로빈 마이어, 역자 이효형 출판사 쿰란 출판사 *위대한 설교는 우주적인 요행도 아닐 뿐 아니라. 모두에게 맞는 한 치수의 옷과 같은 수사학적 표준 방정식도 아니다. 그것은 성육신. 즉 소리의 세계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는 한 사건이다. *위대한 설교를 절정하는 질적 요소는 다름아닌 열정이다. 열정 없이는 설득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 열정은 목회의 소명이 단순한 직업이 되는 것을 막아 주는 요소로 복음을 전하기 위한 에너지요, 그리고 설교가 성직자의 직업적인 의무로 변해버리는 것을 막아주는 말슴을 선포하기 위한 신비한 충동이다.... 열정은 살 수도 배울 수도 없는 것이다. *허버트 시몬 "진정한 의미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전혀 설득하지 않는다. 우리는 단지 그들이 스스로를 설득하도록 자극을 제공할 분이다" *회중을 설득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복음이 상대하는 가장 까다로운 고객을 설득하는 것인데, 이는 곧 설교자가 먼저 자신을 설득하는 일이다. *설교자의 자기 설득이란.... 자기 자신을 위하여 본문과 충분히 대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진짜 문제는 설교자가 듣기를 중단하는 것이다. *하이덱거..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 설교는 단지 명료화하고 교욱하는 것뿐 아니라 뒤엎어 버리는 것이다. *사실 설교가 강력하면서도 위험스럽게 되는 경우는 사람들이 이미 들었다고 하는 것을 새롭게 듣도록 하거나 그들이 이미 알고 있다고 하는 것을 새롭게 배우도록 선포하는 것이다. *통찰은 명료함을 강요한다. *키에르케고르에 의하면, 설교의 목적이란 구속적인 정보로 머리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불안과 의무의 감정으로 마음과 영혼을 채우는 것이다. *설교자는 선포가 아니라 인간 공통성의 조율 피리를 사용하여 심금을 울린다. *묘사는 더 많이, 설명은 더 적게...... *절제-이고르 스트라빈스키 ...

설교 준비법 / 앤드류 블랙우드

설교 준비법 앤드류 블랙우드 - 설교의 착상 목적의 진술 - 설교의 기원이 무엇이든지 간에 목사는 목적을 결정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 목적이 없는 사랑은 어떤 곳에도 도달할 수 없다 . 사격수는 눈을 황소눈처럼 크게 뜨고 표적판을 문제 삼을 뿐이지 , 다른 곳에는 주저하지 않는다 . 이와같이 설교자는 명백한 목표를 가지고 그것을 진술해야 한다 . - 존 헨리 뉴먼 - 설교 준비 단계 1. 설교를 발전시키기 위한 충분한 시간을 활당하라 2. 설교를 작성함에 고상한 목적을 설정하라 . 3. 목적에 따른 본문을 선택하라 . 4. 결론에서 목적을 구체화하라 . 5. 모든 종류의 자료를 수집하여 시작하라 . 6. 모든 사실에 얼마동안 묵상하라 7. 설교의 제목에 관해 생각하라 . 8. 목적에 따라 점차적으로 자료를 배열하라 . 9. 실례에 대한 생각도 아울러 시작하라 . 10. 머리말이나 서언에 대해 결정하라 . 11. 설교의 내용을 작성하라 . 12. 다음날 조심스럽게 원고 수정을 하라 . 13. 메시지를 전달할 준비를 하라 . 14. 강단에서의 준비를 잊지 마라 . 15.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설교를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도록 그를 신뢰하라 . * 설교자에게는 우주적인 진리를 보는 예술가의 방법이 필요하다 . 현대의 설교자가 시인 , 화가 , 음악가들의 작업을 애써 파악하기 전에는 설교하는 법도가 그에게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 - 윌라드 스펠리 * 젊은이여 ! 그대의 일을 조직화하라 , 그대가 읽는 것 , 본 것 , 생각한 것을 기억하는 습관을 길러라 * 서론의 전개 흥미를 불러 일으켜라 . 공감을 확대하라 , 그런 다음 인도할 준비를 갖추라 . 서론의 시금석 1. 너무 흥미롭게 하지 말고 , 재미있게 하라 2. 머리말은 문맥이 단절되지 않는 짤막한 것인가 ? 3. 머리말이 평범하지 않...
이미지
김세윤박사의 바울복음의 기원 갈3:13, 고전1:23, 갈5:11 십자가의 예수를 메시야로 선포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모독 행위 왜? 나무(십자가)에 달린 자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기 때문이다.(신21:23) 갈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신21:23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당일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하나님의 저주 받은 자가 하나님의 메시야라고 말하는 것은 모순이다. 하나님의 자기 모순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핍박의 유일한 이유는 아니다. 고전12: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다메섹 도상의 사건은 내적 빛을 얻은(고후4:6) 것이며, 율법으로 얻은 자기 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다. 하나님의 의를 얻기 위해 자신의 의를 버리는 결단의 시기이다.(빌3:7-9) 도메섹 도상에 바울은 복음과 이방선교에의 소명을 받는다. 즉 바울은 그리스도께 잡힌 바(빌3:2)되었고, 복음을 전해야 하는 신적인 강권 하에 있게 된다.(고전9:6) 인간의 원수였던 그리스도께서 그를 잡아 종으로 삼으셔서(롬1:1; 갈1:10; 빌1:1) 그에게 복음 전파의 사명을 맡기셨다. “이제 그 후부터 바울은 그의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끊길 수가 없었고 복음 전할 숙명(宿命)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그래서 바울은 헬라인이나 야만인에게 빚진 자”로 있었다.(롬1:4) 그리스도 안에서 신자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형상으로 변화된다. 그들은 마지막 아담이요, 새로운 인류의 조상인 그리스도 안에 내포됨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인간’ 또는 ‘카이베 크티시스’로 만들어 진...
류호준교수의 목회단상 “박사(doctor) 용어 유감” I 영어로 “닥터”(doctor)라는 용어가 있다. 번역하자면 “박사”(博士)다. 한자어로 博士(박사)라 함은 문자 그대로 “넓을 박(博)”, “선비 사(士)”로, 널리 두루두루 아는 선비가 박사님이다. 따라서 박사 호칭의 일반적인 용례는 모든 일에 정통하거나 숙달된 사람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그러나 현대 교육제도에서 박사라는 학위나 호칭은 이상에서 말한 전통적인 의미와는 상당히 거리가 멀게 느껴진다. 한 분야에만 깊이 아는 사람이라는 뜻이 현대적 박사의 뜻이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집안에서 누군가 말을 잘하고 이것저것 두루 잘 알면 “박사님 나셨네!”하고 약간의 빈정댐을 섞어 칭찬하기도 하였다. 세상살이, 인생살이에 대해 백과사전적 지식을 갖고 재미있게 이야기 해주는 사람을 가리켜 박사님이라 하였으며 일말의 존경의 대상이기도 하였다. 더욱이 시골에서는 박사님이란 호칭은 신(新)학문을 많이 배워서 무지몽매한 시골사람들에게 뭔가를 알려주고 지도해 줄 수 있는 사람을 박사님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세상살이도 다양해졌을 뿐 아니라 학문의 분야 역시 세분화되어서 한 가지 분야를 깊게 연구하여 전문가가 될 때 박사학위가 주어진다. 내가 알고 있는 분 가운데 현미경으로 초파리만을 평생 연구한 저명한 유전생물학자가 있다. 주위에서는 그분을 부를 때 꼭 박사님이라고 불렀다. 그렇게 부르지 읺으면 그분에게 큰 결례를 범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아니면 그분도 그런 호칭을 좋아하는 듯 보였기 때문이다. 어쨋든 초파리 유전학에 대해 한 말씀해 달라고 부탁이라도 하면, 그 청이 나오기도 무섭게 우리네 보통 사람들이 도무지 알아들을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큰 단어들과 전문적 용어들을 다 동원하여 장황한 설명을 한다. 듣고 있는 사람들은 혀를 내차며 “역시 박사님이야!” 하고 탄성을 내지른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박사님이 인간관계에서 파생하는 윤리적 판단이나 가치관이 시험을 받을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