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호준교수의 목회단상
“박사(doctor) 용어 유감”
I
영어로 “닥터”(doctor)라는 용어가 있다. 번역하자면 “박사”(博士)다. 한자어로 博士(박사)라 함은 문자 그대로 “넓을 박(博)”, “선비 사(士)”로, 널리 두루두루 아는 선비가 박사님이다. 따라서 박사 호칭의 일반적인 용례는 모든 일에 정통하거나 숙달된 사람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그러나 현대 교육제도에서 박사라는 학위나 호칭은 이상에서 말한 전통적인 의미와는 상당히 거리가 멀게 느껴진다. 한 분야에만 깊이 아는 사람이라는 뜻이 현대적 박사의 뜻이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집안에서 누군가 말을 잘하고 이것저것 두루 잘 알면 “박사님 나셨네!”하고 약간의 빈정댐을 섞어 칭찬하기도 하였다. 세상살이, 인생살이에 대해 백과사전적 지식을 갖고 재미있게 이야기 해주는 사람을 가리켜 박사님이라 하였으며 일말의 존경의 대상이기도 하였다. 더욱이 시골에서는 박사님이란 호칭은 신(新)학문을 많이 배워서 무지몽매한 시골사람들에게 뭔가를 알려주고 지도해 줄 수 있는 사람을 박사님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세상살이도 다양해졌을 뿐 아니라 학문의 분야 역시 세분화되어서 한 가지 분야를 깊게 연구하여 전문가가 될 때 박사학위가 주어진다.
내가 알고 있는 분 가운데 현미경으로 초파리만을 평생 연구한 저명한 유전생물학자가 있다. 주위에서는 그분을 부를 때 꼭 박사님이라고 불렀다. 그렇게 부르지 읺으면 그분에게 큰 결례를 범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아니면 그분도 그런 호칭을 좋아하는 듯 보였기 때문이다. 어쨋든 초파리 유전학에 대해 한 말씀해 달라고 부탁이라도 하면, 그 청이 나오기도 무섭게 우리네 보통 사람들이 도무지 알아들을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큰 단어들과 전문적 용어들을 다 동원하여 장황한 설명을 한다. 듣고 있는 사람들은 혀를 내차며 “역시 박사님이야!” 하고 탄성을 내지른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박사님이 인간관계에서 파생하는 윤리적 판단이나 가치관이 시험을 받을 때면 영락없이 낙제생 같은 판단이나 대답을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여러 사람들을 크게 실망시켰다. 그분은 인간관계를 만들어 가는 일이나 어떤 사건의 진행에 대한 판단에서는 언제나 미숙하거나 오판을 하곤 하였다. 그래서 단세포적인 판단이나 유치한 행동을 할 때면, 이 사람이 정말로 박사님이야 하는 의구심마저 들곤 하였다. 이런 분들이야말로 "얇을" 박(薄)의 박사(薄士)님이다.
수십 년 전 신학교에 다닐 때도 그런 일이 있었다. 어떤 교수목사님이 계셨는데 “어른 아이”와 같은 분이었다. 말 그대로 나이로나 사회적 지위로나 육체적으로 볼 때 분명히 어른이었지만 하시는 말이나 생각이 정말 어린아이와 같았다. 좋게 말하면 어린아이처럼 순진하다 할 수 있을 것이고 좀 부정적으로 말하자면 정말 유치(幼稚)했다. 특별히 박사학위에 관해서 그러했다. 그분은 미국에서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나왔고 계속해서 박사과정을 하였지만 학위를 취득하지는 못했다. 그 후 좀 그렇고 그런 유령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러니 당당하게 내놓을 만한 박사 학위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 당시만 해도 한국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외국 학계 사정을 잘 모르던 시절이었고 더욱이 외국 학위의 진위여부에 대해서는 보통 학생들이 잘 알 수 없었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그런 것이 문제는 아니었다. 이분은 수업시간에 자기를 부를 때 반드시 “박사님”이란 호칭을 사용하라고 호통하셨다. 학문의 전당인 학교에서는 “목사님”이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면서 간혹 실수로 자기에게 박사라고 부르지 않고 목사라고 부른 학생을 일으켜 세워 망신을 주곤 하였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아도 해외 토픽 감이다. 학위 콤플렉스가 유독 강하였던 분이었다. 그러니 그분의 강의나 설교나 권면이 귀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이 분 역시 "얇을" 박(薄)士)의 박사(薄士)님이다. 학생들이 교수님한테 감화와 영향을 받는 것이 그분의 학위 때문이 아니라 그분의 인품과 실력에 있다는 사실을 몰랐던 모양이다. 이와는 반대로 내가 배운 또 다른 교수님이 계신다. 그분에게는 박사학위가 없다. 석사 학위가 전부다. 물론 그 사연을 들어보면 충분히 납득이 가는 경우다. 좌우간 그분은 신학계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대가로 정평이 났으며 아무도 그런 평가에 대해 토를 다는 사람이 없었다. 그분으로부터 많은 박사들이 배출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놀랍다. 그는 진정한 의미에서 “박사”(博士)님이었다.
요즈음은 각 분야에서 정말로 많은 박사들이 양산 되는 세상이다. 신학 분야 역시 그렇다. 그런데 문제는 한 분야를 깊게 연구했다하더라도 주변 학문이나 연계 학문에 대한 이해의 폭은 매우 한정적이거나 거의 없기까지 하다는 사실이 눈에 띤다. 예를 들어, 신약학을 전공한 신학 교수에게 누군가 조직신학에 관한 질문을 하면, 돌아오는 대답은 “나는 신약학을 전공했기 때문에 그쪽은 잘 모르겠다”는 것이다. 구약학을 공부한 학자에게 신약성경에 대해 물어보면 “그것은 신약학자의 영역이기 때문에 잘 모른다”라고 다소 겸손하게 말하지만 사실은 겸손해서 보다는 잘 모르기 때문이다. 조직신학을 공부한 학자에게 역사신학이나 성경 신학에 대해 물어봐도 거의 같은 대답이 나온다. 그리고 아무도 이런 현상을 심각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별로 많지 않다는 사실이 경종(警鐘)감이다. 현대의 서구학문이 세분화되어가는 과정에서 이것을 그대로 답습하는 제 3 세계의 학생이나 학자들이 피치 못하게 만나게 되는 결국이다. 한국적 상황도 예외는 아닌 듯하다. 의학계에서 떠도는 말 가운데 “수술을 성공했는데 사람은 죽게 되었다”는 웃지 못 할 경구가 있다. 신학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영혼을 살려내는 일이기에 더더욱 총체적인 접근이 필요한 학문이다.
II
“신학이 영혼을 살려내는 일과 관계를 맺고 있다”는 말을 하자니 옛날이야기가 생각난다. 내가 네덜란드에서 박사과정을 마치고 여러 학자들과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논문을 방어를 하게 된 어느 겨울이었다. 막내아들 성현이는 그 당시 네덜란드 초등학교 1학년이었다. 아빠가 몇 년을 조그만 이층 방에 틀어 박혀 공부하는 것을 보면서, 엄마에게 아빠가 공부한 후에 뭐가 되는 것이냐고 물었나보다. 엄마 왈, “아빠가 닥터(doctor)가 되는 것이야!”라고 지나가는 말로 여러 번 했다고 한다. 드디어 1994년 12월 8일에 암스테르담 자유대학교 본관 건물에서 논문 방어식이 성대하게 열렸다. 좌우에 턱시도를 입은 들러리를 세우고 나 역시 턱시도를 입었다. 이렇게 진행되는 네덜란드 식 박사학위 논문 방어식은 위엄스럽고 품위 있어 보였고 지금도 아련한 향수를 자아낸다. 논문 방어를 성공리에 마치고 리셉션 시간에 많은 사람들이 축하의 인사를 건네었다. 옆에 함께 서있었던 어린 아들이 뜬금없이 물었다. “엄마, 아빠가 이제 닥터가 되었으니 언제부터 아픈 사람들이 우리 집에 오는 거야?” 어안이 벙벙했다. “무슨 소리야?” “아빠가 닥터가 되었잖아요!”
한참 생각하다가 아내와 함께 웃었다. 영어에 “닥터”하면 의사를 가리킨다는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의사”(醫師)를 영어로는 “닥터”(doctor)이고, 영어 “닥터”(doctor)를 사전적으로 번역하면 “박사”다. 거꾸로 “박사”(博士)를 영어로 번역하면 “닥터”(doctor)이고, 닥터는 미국에서 일반적으로 “의사”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어린 아들은 아빠가 닥터가 되었다는 것을 의사로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이 해프닝은 그저 웃고 넘길만한 일은 아니었다. 그 후 나는 여러 번 이 일을 생각하면서 그 때 그 순간을 떠올렸다. 어린 아들을 통해 내가 배운 것은 비싼 등록금을 내고도 잘 배우지 못한 영적 교훈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들을 통해 하나님이 내게 들려주신 가르침은, 목사인 내가 신학공부를 많이 하여 “박사”(doctor)가 된 것은 “아픈 영혼을 고쳐주기 위한 의사(doctor)”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선지자 예레미야가 불현듯 떠올랐다. 한번은 선지자 예레미야는 영적으로 중병이 든 이스라엘을 고쳐줄 의사가 없음을 탄식한 일이 있었다.
“길르앗에는 유향이 있지 아니한가?
그 곳에는 의사(physician)가 있지 아니한가?
그런데 딸 내 백성이 치료를 받지 못함은 어찌 됨인고?” (렘 8:22)
이스라엘의 북동쪽에 위치한 길르앗은 명의(名醫)로 유명한 고장이었다. 병든 이스라엘이 고침을 받지 못한 것을 꼬집어서 예레미야가 그렇게 탄식한 것이다. 명문 의과대학을 나온 의사들과 명문 신학대학을 나온 박사들이 많아도 병든 영혼을 고칠 수 있는 진짜 의사와 진짜 박사가 없다는 사실에 탄식과 슬픔을 금치 못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지금에도 그대로 사실일 수도 있다. 목회학 박사들, 신학박사들, 철학박사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것을 위해 얼마나 고생하고 노력들을 쏟아 부었는가? 그런데 정작 죽어가는 영혼들은 그대로 방치되고 있거나 고칠 수 없는 지경에 있으니 어찌된 일인가 하는 탄식이다. 박사유감이로다! 의사유감이로다!
추신) 한국 신문을 읽다 보면, 의사를 종종 박사라고 호칭하는 경우가 있다. 무지의 소치다. 알다시피 영어권에서는 “의사”(physician)를 가리켜 “닥터”(doctor)라고 하는데, 이것은 “메디컬 닥터”(medical doctor)를 줄여서 “닥터”라고 부르는 것이다. 즉 의학으로 말하자면 최고의 전문인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해외 교포 가운데 의사직업을 갖고 있는 사람을 소개하면서 한국의 신문들을 종종 “홍길동 박사”라고 하는데, 이것은 “의사 홍길동” 혹은 “의사 홍길동 씨”로 고쳐야한다.
2008년 1월 23일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