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신학의 태동

현대신학의 태동 현대신학이라 함은 인간의 자율을 강조하고 성경을 더 이상 계시가 아닌 인간의 이성에 의하여 비평되어야할 인간의 책으로 바라보는 신학이다 라고 정의할 수 있다. 현대신학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자율' 이다. 인간의 이성이 주체가 되어 모든 것을 판단하고 평가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현대신학의 태동은 이미 종교개혁 당시 부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신학은 철학적인 측면에서 합리주의를 따르고, 과학적 측면에서 경험주의이며, 정치적 측면에서 민주주의이다. 현대신학의 태동을 종교개혁 시기로 잡는 이유는 권위적인 중세에서 종교개혁은 개인의 자율를 강조하고, 교회의 권위보다 개인의 성경 해석과 자율을 더 강조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 시기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 갈릴레이가 망원경을 통하여 직접적으로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중세의 권위에 눌려 지내 강요된 믿음에서 개인의 자율을 찾고자하는 이들에게 좋은 빌미가 되었다. 미신적인 중세 종교를 벗어나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삶을 추구하게 된 것이다. 지금까지는 선악의 판단 기준은 내가 아닌 '나의 밖'에 있는 것이었다. 특히 교회와 성경, 신이었다. 현대는 이러한 기준은 개인의 외부에서 개인 안으로 즉 '나'로 바꾸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제 '내'가 판단하고, '내'가 평가하는 것이다. 이것은 갈릴레이의 발견으로 인해 우주의 중심이 지구가 아니라 태양이라는 사실도 큰 몫을 하고있다. 현대를 정의하는 대전제는 우주와 자연는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합리적으로 어떠한 법칙을 따라 움직이고 있으며, 그러므로 과학이 발달하고 시간이 흐르면 올바른 방법을 통하여 얼마든지 모든 것을 알아 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인간에 대한 낙관주의적 평가와 인간을 계발한다면 얼마든지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인본주의적 인간관을 전제하고 있다. 진화론은 이러한 전제 속에서 끊임없는 진화를 통하여 신이 될 수도 있다는 ...

주기철 목사님의 마지막 설교

주기철 목사님의 마지막 설교 "나의 5종목의 기원"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나는 지난 7개월 동안 감옥에 있으면서 특별히 다섯 가지 종목을 들어 기도하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이 시간 그 기도내용을 중심으로 사랑하는 성도들 앞에 "5종목의 나의 기원"이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기도) "오, 하늘에 계신 거룩하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시여. 이번에야말로 순교의 영광을 허락하시는가 싶더니 또 풀어주시어 이렇게 강단에 다시 서게 되었나이다. 아직까지 제가 받은 핍박과 고난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분량에 이르지 못한 걸 알고 있사오나, 할 수만 있다면 이 고통스런 육신을 떠나 하루라도 빨리 주님과 함께 있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옵나이다. 사랑하옵는 주님이시여! 저희들을 붙들어 주시옵소서! 저 간악한 마귀의 흑암권세로부터 지켜주시옵소서! 우리의 믿음이 꺾이지 않도록 주님의 강하신 손으로 붙잡아 주시옵소서! 빛되신 주님의 생명의 말씀으로 저 어두움의 사망권세를 물리칠 수 있도록 붙들어 주시옵소서! 저 불쌍한 어린양들을 천국 가는 길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인도하시옵소서! 이제 이 종이 선포하는 주님의 말씀에 은혜 받고 힘을 얻어서 주님의 뒤를 따르는 일사각오(一死覺悟)의 믿음이 있도록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5종목의 나의 기원! 첫 번째 저의 기도는 "죽음의 권세를 이기게 하여 주옵소서"입니다. 나는 바야흐로 죽음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내 목숨을 빼앗으려는 검은 손은 시시각각으로 내 가까이에 뻗어오고 있습니다. 죽음에 직면한 나는 "사망의 권세를 이기게 하여 주옵소서"하고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무릇 생명이 있는 만물이 다 죽음 앞에서 탄식하며, 숨쉬는 인생은 모두 다 죽음 앞에서 떨고 슬퍼합니다. 사망의 권세는 마귀가 사람을 위협하는 최대의 무...
시편28 구조분석 1-5 모함당한 시인의 여호와를 향한 탄원 6-9 응답에 대한 확신과 감사, 찬양 1. 시인은 악인들에게 모함을 당하고 있다. 3절 ‘저희는 그 이웃에게 화평을 말하나 그 마음에는 악독이 있나이다’ 이러한 모함으로 인하여 시인은 무덤에 내려가는 자와 같다. 사회적으로 매장당함. 그래서 시인은 여호와께서 자신의 부르짖음에 ‘귀를 막지’말아 달라고 탄원한다. 아무것도 할수 없는 상황 속에서 시인은 오직 여호와께만 메달리고 있다. 2. 이유없이 남이 나를 비방할 때 변명하고 싶어진다. 그러나 그것은 역효과를 초래한다. 그렇게 한 자신이 초라해지고, 더 미워진다. 그 때는 여호와께 가야한다. 여호와께서 풀어야 풀린다. 스스로 풀면 더욱 꼬일 뿐이다. 3. 이것은 위기이다. 그러나 기회이다. 이 위기를 잘 풀어나가면 더 깊고, 높은 차원의 신앙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잘못 풀면 패가망신하고 만다. 그러므로 신자는 여호와께 모든 문제를 풀어야 한다. 여호와는 모든 문제의 답이 되시기 때문이다. 수많은 인생이 문제들은 모두 여호와의 손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7 여호와는 나의 힘과 나의 방패시니 내 마음이 저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그 분만이 우리의 진정한 도움이 되신다. 4. 그러므로 이 표현은 고난 당한자들 아주 중요하다. 2 내가 주의 성소를 향하여 나의 손을 들고 주께 부르짖을 때에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소서 여호와께 기도하는 것이 답이요, 진정한 문제 해결의 시작이다. 시인은 여호와께서 자신의 기도에 응답하신다는 확신을 통하여 감사와 찬양을 올리며, 기뻐하고 있다.(6-9)
웃시야왕의 사역 웃시야, 요담, 아하스, 그리고 히스기야(1:1) 그의 사역 기간은 740-680으로 약 60년동안으로 본다. 웃시야왕 : 그의 부친은 아마샤-웃시야와 공동통치, 요담의 아버지 요담(BC 750~731) 웃시야의 사망시기 739 *그는 군대를 훈련하여 약 30만명의 군사를 양육하고 재배치 *강장 현대화된 군사무기들을 만들고 제정비 *그 후에 웃시야는 갓, 야브네, 아스돗의 성벽들을 무너뜨리고 아스돗과 그 근방에 자신의 방어 기지로서 도시들을 재건하였다. *또한 유다의 오랜 적국인 블레셋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였다.(대하26:6) *사해 근방의 아라바에 살던 마온 족속(Meunites)들이 항복하였다. *마침내 암몬 족속들을 압도하였고 그들을 반식민지화함. *더욱 중요한 것은 그가 사막에 정착지를 배치하고 공학과 농경기술의 극치라고 할 수 있는 세벨라(shephelah)평원을 건설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그의 부와 군사적 성공은 그를 교만하게 함으로 몰락으로 가게하였다.(대하26:16) 먼저 그는 모세의 규례를 무시하고 성전에서 제사장을 대신하여 분향하려함.(아사랴 제사장이 상소에서 나가라고 했으나 불순종하고 억지로 분향하려 하자 갑자기 문둥병이 그에게 들었고 성소에서 나와야 했다. 그는 남은 생애를 사회로부터 격리되어 모든 통치권을 상실하고 생애를 마쳐야 했다. 심지어 그는 죽을 때에도 왕들의 묘지에 매장되지 못하고 인접한 평지에 매장되어 하나님의 성물에 대한 그의 무시가 얼마나 큰가를 보여준다.

시편 18편-2

시편 18편-2 신정론 여호와의 종 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 여호와께서 다윗을 그 모든 원수와 모든 원수와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실 날에 다윗의 이 노래의 말로 여호와께 아뢰어 가로되 다윗의 삶을 되돌아본다면 우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다윗의 후미에 관한 결과론적 고백입니다.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다윗이 사울로부터 쫓김을 당해 목숨을 담보로 하는 도피의 생활 중에 어떻게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에 관한 것입니다. 그것을 신학적으로 ‘신정론’이라고 합니다. 헬라어로 데오디시( [神正論, theodicy, 변신론, 신의론])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데오스’와 정의의 ‘디케’라는 말의 합성어이다. 말의 의미는 정의로우신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는데,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세계 안에 악과 모순이 존재하는 데에 대한 답을 찾는 고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울에게서 쫓겨 다닐 때 다윗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아마 하나님을 불공평하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무슨 큰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사울을 대적하거나 반항한 적도 없는데 이러한 식으로 고통을 당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너무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의 상황 속에서 다윗은 자신의 삶 속에 내재한 모순과 부당함을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이 되었을 것입니다. 다윗의 삶 뿐 아니라 현재 우리나라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바라보면 이러한 악의 문제에 대한 고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직 프로야구 선수의 일가족 살해 사건, 삼십대 후반의 어느 남자의 혜진 예슬이의 유괴살인 사건 등을 보면, 이 세상에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수도 없이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끝없이 이어지는 의문의 사건들, 그리고 뇌물을 써서 부당하게 판결을 내리게 하는 불의한 사람들을 볼 때에, 이 세상이 결코 합리적이거나, 공의롭지 못하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다윗은 사울에게 쫓기면서 수도 없이 이러한 질문들을 던지고 또 던졌을 것입니다. ‘내가 왜?, 내가 왜 이런 일을...

길 잃은 죄인들

길을 잃은 죄인들 인간은 타락으로 인해 ‘길’을 잃어 버린 존재입니다. 어디로 가야할지 무엇을 해야할지를 잃어버린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죄는 인간들의 눈을 멀게해서 참된 것을 바라보지 못하게 했고, 죄는 인간들의 귀를 막아 진리의 말씀을 듣지 못하도록 만들었습니다. 또한 죄는 인간들의 입을 막아 바른 말을 하지 못하도록 막아 버렸습니다. 인간이 길을 잃었다는 말은 인간의 살아갈 도리와 목적과 삶의 의미를 잃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즉 자신이 누구이며,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야하는지를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여호와 하나님을 향하여 자신을 지도해 달라고 간구하고 있습니다. 4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보이시고 주의 길을 내게 가르치소서 5 주의 진리로 나를 지도하시고 교훈하소서 주는 내 구원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종일 주를 바라나이다 8~9, 12절 역시 주의 가르침을 기대합니다. 8 여호와는 선하시고 정직하시니 그러므로 그 도로 죄인을 교훈하시리로다 9 온유한 자를 공의로 지도하심이여 온유한 자에게 그 도를 가르치시리로다 12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 누구뇨 그 택할 길을 저에게 가르치시리로다 그럼 왜 우리는 주의 지도와 가르침을 받아야 하는가? 그것은 죄로 인하여 우리의 눈과 귀가 멀었기 때문이며, 우리의 이성이 하나님을 이해하지도 깨닫지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시편기자는 불가피하게 자신의 죄악들을 여호와 앞에 고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7 여호와여 내 소시의 죄와 허물을 기억지 마시고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나를 기억하시되 주의 선하심을 인하여 하옵소서 11 여호와여 나의 죄악이 중대하오니 주의 이름을 인하여 사하소서 18 나의 곤고와 환난을 보시고 내 모든 죄를 사하소서 시인은 분명 큰 어려움과 고통 가운데 빠져있습니다. 그는 원수들로부터 조롱과 비웃음 거리가 되었습니다.(2,3,16,17,18,19,20,22) 그 이유는 아마 시인이 죄로 인하여 하나님께로부터 징계를 받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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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손과 발이 싸우고 있었다.발이 먼저 불평을 털어 놓았다.나는 밤낮 꼬랑내나는 구두 속에 들어가 심방이나 다니고 맛있는 음식이나 좋은 것은 한번 못 만지고 살다니.그 때 손이 대답했다.그러나 너는 언제 내 손을 씻어 주었니? 그래도 나는 너의 더러운 발을 씻어 주지 않니? 그러자 발이 말했다.그래도 너는 높은 데 붙어 있지 않니? 나는 그게 부럽단다.그 때 손이 대답했다.높은 데 있으면 뭘 하니? 무거운 것은 나혼자 들고 다니는데."
설교의 정의 강해 설교란 성경 본문의 배경에 관련하여 역사적, 문법적, 문자적, 신학적으로 연구하여 발굴하고 알아낸 성경적 개념, 즉 하나님의 생각을 전달하는 것으로서, 성령께서 그 개념을 우선 설교자의 인격과 경험에 적용하시며, 설교자들을 통하여 다시 회중들에게 적용시키는 것이다. 해돈 로빈슨. 강해설교 기독교문서선교회
매력 잃은 설교자 James stewart 하나님의 집에 대한 열정이 더 이상 그를 삼키지 않는다. 더 이상 그는 그 능력, 구원의 강력한 위대함 속을 거닐며 예수 그리스도게서 그늘 참석한 자신의 회중들 가운데 임하실 것이라는 전율에 사로잡힌 기대를 가지고 강단에 오르지 않는다. 시큰둥하고 지리하게 그 때 자신에게 세상에서 가장 극적이던 소식을 이제 이야기할 뿐이다. 하나님의 사죄하심에 관한 열정과 날카로움과 기백, 부활하신 주님의 임하심에 관한 넘치는 희락과 즐거운 확신. 초자연적인 은혜에 대한 경이. "만일 내가 설교하지 않으면 내게 화가 임하리라"고 외치려는 자세, 이 모든 것을 사라져 버렸다. 그 사람은 뜨거운 마음을 상실했다. 그는 매력을 잃어 버렸다. 게다가 그것은 그리스도의 대사에겐 비극이다. -Presaching
[설득력있는 설교]에서 좋은 글들을 발췌한 것입니다.. 저자 로빈 마이어, 역자 이효형 출판사 쿰란 출판사 *위대한 설교는 우주적인 요행도 아닐 뿐 아니라. 모두에게 맞는 한 치수의 옷과 같은 수사학적 표준 방정식도 아니다. 그것은 성육신. 즉 소리의 세계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는 한 사건이다. *위대한 설교를 절정하는 질적 요소는 다름아닌 열정이다. 열정 없이는 설득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 열정은 목회의 소명이 단순한 직업이 되는 것을 막아 주는 요소로 복음을 전하기 위한 에너지요, 그리고 설교가 성직자의 직업적인 의무로 변해버리는 것을 막아주는 말슴을 선포하기 위한 신비한 충동이다.... 열정은 살 수도 배울 수도 없는 것이다. *허버트 시몬 "진정한 의미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전혀 설득하지 않는다. 우리는 단지 그들이 스스로를 설득하도록 자극을 제공할 분이다" *회중을 설득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복음이 상대하는 가장 까다로운 고객을 설득하는 것인데, 이는 곧 설교자가 먼저 자신을 설득하는 일이다. *설교자의 자기 설득이란.... 자기 자신을 위하여 본문과 충분히 대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진짜 문제는 설교자가 듣기를 중단하는 것이다. *하이덱거..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 설교는 단지 명료화하고 교욱하는 것뿐 아니라 뒤엎어 버리는 것이다. *사실 설교가 강력하면서도 위험스럽게 되는 경우는 사람들이 이미 들었다고 하는 것을 새롭게 듣도록 하거나 그들이 이미 알고 있다고 하는 것을 새롭게 배우도록 선포하는 것이다. *통찰은 명료함을 강요한다. *키에르케고르에 의하면, 설교의 목적이란 구속적인 정보로 머리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불안과 의무의 감정으로 마음과 영혼을 채우는 것이다. *설교자는 선포가 아니라 인간 공통성의 조율 피리를 사용하여 심금을 울린다. *묘사는 더 많이, 설명은 더 적게...... *절제-이고르 스트라빈스키 ...

설교 준비법 / 앤드류 블랙우드

설교 준비법 앤드류 블랙우드 - 설교의 착상 목적의 진술 - 설교의 기원이 무엇이든지 간에 목사는 목적을 결정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 목적이 없는 사랑은 어떤 곳에도 도달할 수 없다 . 사격수는 눈을 황소눈처럼 크게 뜨고 표적판을 문제 삼을 뿐이지 , 다른 곳에는 주저하지 않는다 . 이와같이 설교자는 명백한 목표를 가지고 그것을 진술해야 한다 . - 존 헨리 뉴먼 - 설교 준비 단계 1. 설교를 발전시키기 위한 충분한 시간을 활당하라 2. 설교를 작성함에 고상한 목적을 설정하라 . 3. 목적에 따른 본문을 선택하라 . 4. 결론에서 목적을 구체화하라 . 5. 모든 종류의 자료를 수집하여 시작하라 . 6. 모든 사실에 얼마동안 묵상하라 7. 설교의 제목에 관해 생각하라 . 8. 목적에 따라 점차적으로 자료를 배열하라 . 9. 실례에 대한 생각도 아울러 시작하라 . 10. 머리말이나 서언에 대해 결정하라 . 11. 설교의 내용을 작성하라 . 12. 다음날 조심스럽게 원고 수정을 하라 . 13. 메시지를 전달할 준비를 하라 . 14. 강단에서의 준비를 잊지 마라 . 15.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설교를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도록 그를 신뢰하라 . * 설교자에게는 우주적인 진리를 보는 예술가의 방법이 필요하다 . 현대의 설교자가 시인 , 화가 , 음악가들의 작업을 애써 파악하기 전에는 설교하는 법도가 그에게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 - 윌라드 스펠리 * 젊은이여 ! 그대의 일을 조직화하라 , 그대가 읽는 것 , 본 것 , 생각한 것을 기억하는 습관을 길러라 * 서론의 전개 흥미를 불러 일으켜라 . 공감을 확대하라 , 그런 다음 인도할 준비를 갖추라 . 서론의 시금석 1. 너무 흥미롭게 하지 말고 , 재미있게 하라 2. 머리말은 문맥이 단절되지 않는 짤막한 것인가 ? 3. 머리말이 평범하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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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윤박사의 바울복음의 기원 갈3:13, 고전1:23, 갈5:11 십자가의 예수를 메시야로 선포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모독 행위 왜? 나무(십자가)에 달린 자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기 때문이다.(신21:23) 갈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신21:23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당일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하나님의 저주 받은 자가 하나님의 메시야라고 말하는 것은 모순이다. 하나님의 자기 모순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핍박의 유일한 이유는 아니다. 고전12: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다메섹 도상의 사건은 내적 빛을 얻은(고후4:6) 것이며, 율법으로 얻은 자기 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다. 하나님의 의를 얻기 위해 자신의 의를 버리는 결단의 시기이다.(빌3:7-9) 도메섹 도상에 바울은 복음과 이방선교에의 소명을 받는다. 즉 바울은 그리스도께 잡힌 바(빌3:2)되었고, 복음을 전해야 하는 신적인 강권 하에 있게 된다.(고전9:6) 인간의 원수였던 그리스도께서 그를 잡아 종으로 삼으셔서(롬1:1; 갈1:10; 빌1:1) 그에게 복음 전파의 사명을 맡기셨다. “이제 그 후부터 바울은 그의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끊길 수가 없었고 복음 전할 숙명(宿命)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그래서 바울은 헬라인이나 야만인에게 빚진 자”로 있었다.(롬1:4) 그리스도 안에서 신자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형상으로 변화된다. 그들은 마지막 아담이요, 새로운 인류의 조상인 그리스도 안에 내포됨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인간’ 또는 ‘카이베 크티시스’로 만들어 진...
류호준교수의 목회단상 “박사(doctor) 용어 유감” I 영어로 “닥터”(doctor)라는 용어가 있다. 번역하자면 “박사”(博士)다. 한자어로 博士(박사)라 함은 문자 그대로 “넓을 박(博)”, “선비 사(士)”로, 널리 두루두루 아는 선비가 박사님이다. 따라서 박사 호칭의 일반적인 용례는 모든 일에 정통하거나 숙달된 사람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그러나 현대 교육제도에서 박사라는 학위나 호칭은 이상에서 말한 전통적인 의미와는 상당히 거리가 멀게 느껴진다. 한 분야에만 깊이 아는 사람이라는 뜻이 현대적 박사의 뜻이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집안에서 누군가 말을 잘하고 이것저것 두루 잘 알면 “박사님 나셨네!”하고 약간의 빈정댐을 섞어 칭찬하기도 하였다. 세상살이, 인생살이에 대해 백과사전적 지식을 갖고 재미있게 이야기 해주는 사람을 가리켜 박사님이라 하였으며 일말의 존경의 대상이기도 하였다. 더욱이 시골에서는 박사님이란 호칭은 신(新)학문을 많이 배워서 무지몽매한 시골사람들에게 뭔가를 알려주고 지도해 줄 수 있는 사람을 박사님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세상살이도 다양해졌을 뿐 아니라 학문의 분야 역시 세분화되어서 한 가지 분야를 깊게 연구하여 전문가가 될 때 박사학위가 주어진다. 내가 알고 있는 분 가운데 현미경으로 초파리만을 평생 연구한 저명한 유전생물학자가 있다. 주위에서는 그분을 부를 때 꼭 박사님이라고 불렀다. 그렇게 부르지 읺으면 그분에게 큰 결례를 범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아니면 그분도 그런 호칭을 좋아하는 듯 보였기 때문이다. 어쨋든 초파리 유전학에 대해 한 말씀해 달라고 부탁이라도 하면, 그 청이 나오기도 무섭게 우리네 보통 사람들이 도무지 알아들을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큰 단어들과 전문적 용어들을 다 동원하여 장황한 설명을 한다. 듣고 있는 사람들은 혀를 내차며 “역시 박사님이야!” 하고 탄성을 내지른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박사님이 인간관계에서 파생하는 윤리적 판단이나 가치관이 시험을 받을 때...

사람들은 왜 책을 불태우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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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왜 책을 불태우는가? 중국 진시황의 분서갱유 사건이 이 책에는 없다. 안타깝다. 분서갱유 사건을 말하지 않고 책의 파괴역사를 쓴다는 것은 어쩐지 어설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책의 파괴사를 잘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책을 불태우는 것일까? 책을 싫어하는 이념 중의 하나는 '공산주의(사회주의와 동일하게 보자)'이다. 그들은 책을 무척 싫어한다. 중국에서 공산혁명이 일어났을 때, 북한도, 소련도... 책을 파괴하고 유식자들을 잡아 죽였다. 사회주의는 신천지를 만들려는 혁명사상이 존재한다. 이것이 책을 파괴하는 것이다. 책은 인류가 걸어온 길을 전달한다. 그리고 후손들은 그 책을 읽음으로 그 길을 답습하게 된다. 그런데 사회주의는 이러한 전통을 파괴하는 이론이기 때문에 책은 당연히 없어져야 하는 것이다. 저자가 8장에서 이러한 정보를 흘려 보내고 있다. 또다른 책의 파괴는 종교적이고 정치적인 곳에서 일어난다. 금서를 정하는 것이다. 왜 금서인가? 그 책을 읽음으로 종교나 정부에 도전하는 혁명적 사상을 불러 일으키기 때문이다. 기존 권력을 유지하려는 시도가 그 책들을 금서로 만드는 것이다. 노무현 정권의 기자실 폐쇄는 또다른 분서갱유 사건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다. 지금도 우린 끊임없이 나를 도전하는 자들에게 금서를 강요하고 있으며, 나 또한 타인들을 통해 금서를 강요 당하고 있다. 그러기에 책은 항상 숨겨지면서, 파괴되고 있는 것이다. 내 안의 금서는 무엇인지? 오늘 그것을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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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소개] 1 950년 9월28일 손양원목사님이 순교하심으로 장례를 했다.장례식후 찍은 가족 사진이다.맨뒤의 학생은 손양원목사 두 아들 손동인,손동신씨를 1948년 여순사건때 죽였던 안재선씨다. 손양원목사가 살려내 양아들로 삼았다. 동인, 동신씨를 대신해서 맞 상주의 책임을 다했다. 하얀 옷을 입은 분은 손양원목사 사모님 정양순씨이며 안고 있는 아들은 손양원목사님이 돌아가신 날 새벽에 태어나신 손동장목사님이시다. 현재 분당에서 목회를 하고 계신다. 그 옆에 있는 아이들은 둘째딸 동임씨와 셋째 동연씨이다. [사진소개] 애양원 입구에서의 손양원 목사님 손양원목사는 별명이 삼경목사이다.손양원목사를 만나면 세 번 놀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손양원목사를 만나면 외모가 멋지게 생겼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가 그 외모가 초라하고 볼품이 없어서 첫 번째로 놀라고, 다음으로 그 조그마한 체구에 품어져 나오는 소리에 놀라고,세 번째는 설교말씀에 놀란다고 한다. 그래서 별명이 삼경목사다. [사진소개] 1939년 7월 14일 애양원에 이사 한 후 사택앞에서 가족과 함께 찍은 사진 여순반란사건 때 아들 동인과 동신이 반란군에게 죽임을 당하고 나서 하나님께 드린 10가지 제목의 감사입니다. 첫째. 나 같은 죄인의 혈통에서 순교의 자식들이 나오게 하셨으니 감사합니다. 둘째. 허다한 많은 성도들 중에 어찌 이런 보배들을 주께서 하필 내게 맡겨 주셨는지 그 점 또한 감사합니다. 셋째. 3남 3녀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두 아들 장자와 차자를 바치게 된 나의 축복을 감사합니다. 넷째. 한 아들의 순교도 귀하다 하거늘 하물며 두 아들의 순교이지요. 하나님 , 감사합니다 다섯째. 예수 믿다가 누워 죽는것도 큰 복이라 하거늘 하물며 전도하다 총살 순교 당함이요, 감사합니다. 여섯째. 미국 유학 가려고 준비하던 내 아들. 미국보다 더 좋은 천국에 갔으니 내 마음이 안심되어 감사합니다. 일곱째. 나의 사랑하는 두 아들을 총살 한 원수를 회개시켜 내...